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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은 사랑에 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 하는 사랑에 한해서 그랬다.
 
 
 
손가락 발가락 열개씩 잘 달고 태어났고, 이목구비도 제자리에 보기좋게 붙어있었다. 키가 작냐? 남자평균 175의 대한민국에서 흔치 않은 180 장신에게 당치도 않은 소리다. 성격상에 특별히 모난 부분이 있다기엔 빈의 반경 2m는 늘 사람으로 들끓었다. 요컨대, 빈은 반도에서 드물게 잘생기고, 키도 크고, 성격까지 적당히 재밌고 쾌활한, 그러니까 한마디로 ‘잘난’ 인간이란 거다. 이 기회를 틈타 자랑 좀 하자면 고백도 꽤 많이 받았다. 안타깝게도 번번이 마음이 통하질 않았을 뿐.
 
 
그런데 왜???
 
 
오ㅐ애... 처절하게 왜를 부르짖는 빈에 마주 앉은 명준이 얼른 한껏 벌어진 빈의 입을 틀어막았다. 빈은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명준의 제지에도 개의치 않고 쉴 새 없이 웅얼거리는 바람에 축축한 입술이 손바닥으로 온통 뭉개졌다. 삐딱하게 기울어있던 얼굴이 푹 떨궈졌다. 잠들었나 했더니 명준의 손에 힘이 빠진 틈을 타 그를 물리고 테이블을 더듬어 술병을 찾는다. 잔이 엎어지는 바람에 꽤 큰 파열음이 귀를 울리자 그제야 정신이 든 명준이 이팔저팔 읊조리며 물수건으로 손을 박박 닦았다. 야시발제발그만마셔... 180 근육덩어리, 그것도 이미 알코올에 절여져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른 거구를 어깨에 이고 귀가해야 하는 입장으로서는 이 이상으로 취한다는 게 퍽 난감한 일이란 거다. 술 좀 마셔달라는 애처로운 말에 또 속아 넘어간 내가 똘추지. 손바닥에 여직 맴도는 섬찟한 촉감에 빈과의 손절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명준이 자꾸만 술잔을 쥐려는 손을 재빠르게 쳐냈다. 빈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뱉으며 칭얼거렸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고개가 일순 고꾸라지고, 반들반들한 갈색 머리꼭지만이 시야에 들어차자 명준은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판을 뒤적여 타지 않은 고기를 골라내어 집게 째로 입에 쑤셔 넣은 그가 질질 끌듯 몸을 일으켰다. 기운이 다 빠져 비장하다 만 눈빛으로 눈앞의 머리 아픈 꼴을 훑었다.
 
 
“왜 나는 연애를 못하는 거야...”
 
 
제 몸집보다도 큰 짐짝을 둘러 맨 명준이 빈이 웅얼거린 그 말에 잠시 멈춰 섰다. 길게 숨을 내쉰 그가, 그니까 그건 다 네가 이토록 구질구질한 탓이 아닐까, 라고 오늘도 듣는 이 없는 촌철살인을 날리고 다시 걸음을 뗀다. 발을 옮길 때마다 빈의 신발 앞코가 아스팔트 바닥에 질질 끌려 구질구질한 소리가 났다. 지 주인 닮아서 신발도 찌질한갑네. 움직임을 읽고 반짝 불이 들어온 가로등 아래로 빈을 내던져놓고 튈까 하는 고뇌를 골백번도 더 반복했을 즈음에 택시가 잡혀 명준이 얼른 차 안으로 빈을 밀어 넣었다. 아저씨, 역삼동 ○○빌라요. 가능한 한 천처언~히 밟아주세여. 할증 붙어 매섭게 비싸진 택시비 폭탄이나 맞으라는 고약한 심보다. 하루치 복수를 마친 명준이 손을 탈탈 털고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밤길을 나섰다. 
 
 
 
 
 명준의 배려아닌 배려로 가로등 아래 버려진 곰인형 신세를 면한 빈이 기사에게 거금을 뜯기고 터덜터덜 골목을 걸었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아직 비몽사몽한 채로 찬바람을 맞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손을 뻗어 더듬고 있는 담이 훅 가까워졌다가 또 훅 멀어졌다가, 구름이 드리운 달이 두개였다가 찌그러졌다가 한다. 아이씨...... 바깥공기에 취기가 가시기는커녕 목 끝까지 뜨거운 감이 차올라 빈이 결국 잠시 멈춰 섰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눈에 익은 낡은 건물은 나타날 기미조차 안보인다. 어디야 여기... 청주(길치)피플 문빈에게 고작 네 달 거주한 서울의 온통 꼬이고 맞물린 골목은 아직 어렵다 이 말이다. 집을 코앞에 두고 길을 잃고야 만 전무후무의 사태에 진이 쭉 빠진 빈이 담벼락에 몸을 기대어 섰다. 곧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철푸덕 앉은 꼴이 되었다. 어떡하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머리를 힘껏 굴려 실마리를 모색해보았으나 그야말로 노답의 상황이다. 염치 불고하고(사실 이젠 더이상 불고할 염치도 남아있지 않았다) 명준에게 연락을 취하려는 의중이었으나 지문인식을 세 번째 실패하던 때에 멀찍이서 다가오는 인영이 보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이 일단 반가워 빈이 저기...! 그를 부르며 몸을 벌떡 일으킨 찰나였다. 세상이 핑글 돌더니 남자의 몸뚱이가 아닌 시커먼 하늘이 시야에 가득 들어찬다. 그대로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바닥에 쾅 박은 뒷통수가 아릿했다. 뭐야, 저기요! 괜찮으세요? 정신 차려봐요! 듣기 좋은 목소리가 웅웅 번지듯 귀에 들어박히고 이내 훅 다가온 남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시발, 존나 잘생기셨네요... 손을 들어 밀랍인형같이 섬세한 얼굴을 만져보려 했으나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풀려가는 눈에 다급하게 뺨을 내리친 남자의 따끔거리는 손길을 마지막으로, 빈의 전뇌는 기록을 중단했다. 감기는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 빈은 그냥 속눈썹이 서서히 내려앉도록 내버려두었다. 
 
 
 
 
 
 
 허억. 빈이 누운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악몽을 꾼 탓이다. 무슨, 명준이형이랑 한참 마시고 취해서 들어가는 길에 세상이 뒤집어졌고, 존나, 진짜 존나 잘생긴 남자랑 키스하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문자 그대로 미친 전개에 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연애가 하고 싶긴 했나보다 문빈…. 욕망이 똬리를 튼 꿈자리를 되새기자 머쓱해져 알 수 없이 시큰거리는 뒷통수를 슥슥 매만졌다. 매만졌는데.... 헐시발 이게 뭐지. 주먹만 한 뭐가 살 위로 잡혀 머리가 불룩하게 솟아올라 있던 거다. 놀라 몇 번이고 제 머리를 쓰다듬던 빈이 여지껏 반쯤 감겨있던 눈을 번쩍 크게 떴다. 
 
 
“머야.... 여기 어디야.”
 
 
일어나 마주한 건 생전 처음 보는 장롱이다. 장롱뿐 아니라 다른 가구들도, 그들의 배치도, 심지어 벽지에 새겨진 자잘한 무늬들마저도 쌩 초면이었다. 어쩐지 침대가 이상할 정도로 푹신하다 했어. 대충 납작한 매트리스 하나 깔고 자는 빈의 자취방 잠자리와는 규모부터 달랐다. 양팔을 넓게 벌려도 끝이 닿지 않았다. 간만에 느끼는 포근함에 다시 누워 잠시 퍼덕이던 빈이 정신을 다잡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가...
 
 
“일어났네.”
 
 
헐.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틀어보니, 지금 마주한 건 틀림없이 꿈 속 그 남자다. 미친 거 아니야? 빈의 사고회로가 삐걱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벙 찐 문빈이 버썩 마른 입술을 훑었다. 저도 모르게 이불을 죽 끌어다 덮으니 남자가 의아한 표정을 한다.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에 그저 무릎까지 덮은 요만 덥썩 쥐자 손가락에 닿는 감은 한없이 보드랍고 또 가슬했다. 쉬지 않고 둥근 손끝으로 이불을 건드려 빚어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남자의 미간이 설핏 좁혀졌다. 그러니까. 이건 분명히 현실이란 거다. 남자가 더 이상 꿈속에서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으니까. 표정이 굳어짐과 동시에 짙은 눈썹이 씰룩이며 움직이는데,
 
 
“와 진짜 잘생겼다....”
 
 
생각만 한다는 게 문장의 형태로 혀를 타고 빼꼼 고개를 내밀자 놀란 빈이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입 밖으로 밀려 나온 진심 어린 감탄은 이미 너른 방안을 웅웅 울리며 남자의 귀에 안착한 후였다.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얼핏 봐도 웃음을 참는 낯이라 빈의 귀가 삽시간에 빨갛게 변했다. 갑자기 숙취가 밀려오는 듯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비몽사몽한 정신이며 어릿한 뒷통수며, 꿈인 줄 알았는데, 꿈이어야 하는데 현실이 되고야 만 상황까지 사방에서 빈을 몰아붙여 온통 정신이 없었다. 죄송하다, 감사하다 이런 말들이 조각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때아니게 얼을 타는 빈에 남자가 먼저 입을 뗐다.
 
 
“너 미성년자지.”
 
 
에? 그 소리 또한 생각을 거치지 않고 공기 중으로 튀어나왔다. 확실히 바보같이 들렸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어 빈은 그저 입을 헤 벌렸다. 미자탈출한지 얼마 안 된 건 맞지만, 겨우 스무 살이라 민증에 잉크도 안 마른 건 맞지만 어쨌거나 저는 너무나 명백히 성인이란 말이다. 억울함에 댓 발 나온 입술이 얼른 항변하려 움직이는데 명쾌한 생각이 번뜩 스쳤다. 백 마디 해명을 해봐야 저 확신의 찬 어조에는 설득력이 조금도 없을 테다. 그럼 아예 깔끔하게 민증을 보여주면 되지 않는가. 빈이 달싹이던 입술을 감쳐물고 바닥에 대충 개어져있는 제 외투를 집어들었다. 자신 있게 주머니에서 지갑을 찾았다.
 
 
“저 미자 아니거든요? 이거 보세...요...? 어???”
 
 
민증이 꽂혀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있어 말소리가 사그라든 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당황한 빈이 손을 바삐 움직였지만 얕은 주머니에서 잡히는 건 없었다. 아무래도 대충 주머니에 쑤셔넣어둔 걸 정신없이 헤매던 중에 어디다 떨어뜨린 것 같았다. 시발 큰일났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시선을 위로 올리니 조소한 남자가 그럼 그렇지, 말하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뭐...요?”
 
 
뭘 요구하는 건지 몰라 일단 큼지막한 손바닥 위로 제 손을 슬며시 올려놓으니 다시 웃음을 참는 얼굴이 된다. 아니구나... 일년치 부끄러운 일을 오늘 다 경험하는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수치 파티일 리 없다며 빈이 믿지도 않는 신을 찾아 원망했다. 어릴 적부터 달란트 잔치나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교회에 얼굴을 비추던 나이롱 신자였지만 어쨌든 일말의 믿음이라도 보였으면 그에 대한 보상을 마땅히 해야 할 거 아니냐고요. 시덥잖게 이어지던 생각은 곧 멎었다. 남자의 정갈한 입술이 벌어지는 모양새가 늘어진 테이프를 감아놓은 듯 찬찬히 눈에 들어왔으므로.
 
 
“말고, 핸드폰. 부모님한테 연락드리게.”
 
 
지금 이 상황보다 더 수치스러울 일이 생길 게 있나. 나이 스물씩 처먹고서 술에 푹 담궈진 몸으로 외간 남자 집에서 퍼질러져 자고 일어나 미자라고 의심받는 상황을 부모님께 들켜봐야 좋을 게 없다. 대학 보내놨더니 술고래가 다됐다며 한 이주치 용돈이 끊겨 고통 받을 미래가 선했다. 머뭇거리자 대신 옷가지를 들어 핸드폰을 가져가려는 걸 겨우 붙잡아 만류한 빈이 아 진짜 아닌데... 믿어주시면 안돼요? 저 진짜 미자 아닌데요... 웅얼거렸다가 차가운 시선만 돌려받고 골똘히 고민에 빠졌다. 결국 빈이 명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왜또 전화야……. 나너랑술안마셔 이제.”
 
 
아니 그게 아니라.. 형 나 성인 맞죠... 졸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대고 그렇게 말하니 수화기를 타고 넘어오는 한숨의 골이 깊다. “어제 그렇게 마시더니 드디어 돌앗니 문빈아. 이정도면 잘생겻는데 애인이 안 생긴다며 마빡에 민증 붙이고 지랄햇던 게 누구더라.” 사건의 경과가 그렇게…. 해명은 됐으나 또다시 밀려오는 수치에 빈이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형... 일단 고마워요... 미안... 사랑해... 읊조린 빈이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가 기어이 소리 내 웃었다. 
 
 
“그만 좀 웃어요...”
 
 
그 말에 남자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와하하, 쏟아지는 호탕한 음성에 빈이 작게 역정을 냈다. 아 웃지 말라고요. 그러나 웃음이 멈출 기미가 없자 빈이 옷을 휙 챙겨들었다.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글고 죄송했습니다. 끅끅대며 웃느라 침대 쪽으로 기울어진 뒷통수에 대고 대충 사과와 감사의 말을 버무려 던진 빈이 방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남자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 여전히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빈을 향해 돌아섰다.
 
 
“너무 어려보여서 헷갈렸나 봐요. 목소리도 애기 같고.”
 
 
미안해서 어쩌지. 뭐라도 먹고 갈래요? 미안한 표정이랑은 거리가 멀었지만 잘생기긴 무지하게 잘생겨서 그런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좀 고된 일이라 빈은 그냥 입술만 비죽 내밀고 고개를 주억였다. 앉아있어요. 그 말에 꼼짝 않고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자니 보글보글 뭐가 끓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매콤하게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돌았다. 동시에 울리는 꼬르륵 소리에 빈이 배를 붙잡았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학교 가야 하는데. 지금 집을 나서봐야 소용없을 테다. 빈은 조용히 폰을 들어 대출 좀 부탁한다고 동기에게 톡을 남겼다. 눈을 뜬 순간부터 빼곡하게 정신없는 일들의 연속이라 벌써 진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게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라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둘을 감싼 상황이 그리 녹록지는 못했으나 뭐가 됐든 완식남과의 만남으로 인한 설렘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렇다. 빈에게 애인이 생기지 않는 합리적 이유는 빈이 생각하기에 딱 하나뿐이었다. 게이라는 것. 그것도 눈이 무지하게 높은. 기분이 묘해져 부드러운 이불을 코끝까지 덮은 빈이 킁킁 숨을 들이마셨다. 보송한 햇볕 냄새가 났다. 잠시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남몰래 실실대고 있는데,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뭐해요? 말을 건넨다.
 
 
“헉.”
“다 됐어요. 나와서 먹어요.”
 
 
영락없이 변태처럼 보였겠지. 어찌되었든 오늘 하루 제 맘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며 불평한 빈이 발을 질질 끌고 걸어 나와 남자와 마주 앉았다. 여상한 얼굴로 그릇에 빈의 몫을 그득 담아 밀어주는 남자에 다시 한 번 설렘을 느끼려던 차였다. 갑자기 불안해져 몇 가닥 집어든 면을 코앞에 두고 빈이 입을 뗐다.
 
 
“저 어제 뭐 실수 같은 거는 안했죠….”
“실수요? 뭐 별 거 없었어요.”
 
 
아 다행이다…. 밀려오는 생각을 가로막은 것은 따라붙는 남자의 말이었다. “갑자기 제 목 끌어안더니 입술 붙이고, 귀에 대고 소리 지르고, 러그에 토한 것만 빼면요.” 이 사람 이거 나 멕이려고...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으나 간밤의 일만 놓고 보면 남자를 멕이려 혈안이 된 건 되려 제 쪽이었다. 추태를 전해 듣자 벙  쪄 젓가락에 대롱대롱 걸려있던 면발들이 수직 낙하했다. 미안함에 입술을 내밀은 빈이 연신 죄송합니다 사과를 건넸다.
 
 
“그만 죄송해도 되니까 얼른 먹어요.”
“네에....”
 
 
빈이 얼른 그릇에 코를 박고 물처럼 라면을 들이켰다. 부끄러움에 견딜 수 없는 와중에도 라면을 어찌나 잘 끓였는지 적당히 꼬들거리는 면발이 입안에 감겨 빈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뱉었다. 라면 진짜 잘 끓이시네여... 얼빠진 그 말에 한 번 더 크게 웃고 만 남자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차차 말을 붙였다.
 
 
“오해한 건 진짜 미안해요. 귀엽게 생겨서 고등학생인 줄 착각했어요.”
“……아이, 또 말을 그렇게 하시면.”
 
 
잠시 시선을 들어 남자와 눈을 마주친 빈이 금세 달아오르는 낯에 다시금 고개를 푹 숙였다. 뜬금없는 칭찬을 건네고서 스스로도 꽤 머쓱했는지 남자도 한동안 먹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어색한 공기로 적막이 내려앉은 와중에도 국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들이킨 빈이 입가심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여러모로 꿈결 같던 만남을 맺을 시점이었다.
 
 
“오해한 거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야말로 지난밤엔 정말 죄송했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하고 현관으로 나가 신발을 꿰어 신자 남자가 등받이에 걸어둔 겉옷을 건넸다. 영 할 말이 있는 표정이라 빈이 잠시 문을 등지고 남자를 기다렸다. 한참을 달싹이기만 해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이 차차 벌어졌다.
 
 
“그, 미안하면. 번호 좀 줄래요?”
“에?”
 
 
맥락 없이 던져진 말에 남자가 괜히 목을 큼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냥,... 이런 것도 인연이라고, 친해지고 싶어서요.
 
 
감사합니다 형... 연락할게! 얼떨떨한 기분으로 번호를 찍어 건네자 돌아온 말을 편하게 해달라는 소리에 경어도 반말도 아닌 요상한 어투를 구사한 빈이 얼른 집을 쏙 빠져나왔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딱 봐도 저보다 어른이라 호칭은 이미 형으로 정리한 참이었다. 밀려오는 숙취며 간만에 얌전을 떨어 쥐가 난 몸이 문을 나서자마자 고통을 호소했다. 얼른 찌뿌둥한 몸을 풀고 싶었으나 여기선 절대 금물이다. 누가 지켜보기라도 하는 양 공수자세로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빈이 1층 출입구에 다다라서야 주위를 한 번 슥 훑고서는 호날두 세레머니 음소거 버전을 선보였다. 과연 쾌재를 부를만한 일이었다. 어쩌다 완식남이랑 만나게 되었는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엉망인 전개였는데, 그쪽에서 먼저 번호를 따간 상황이라니. 화면을 켜 가지런히 적힌 ‘차은우형’ 네 글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쩜 이름마저도 차은우일까 하는 다소 주책맞은 생각까지 들었다. 몸을 가득 채우는 따뜻한 기운에 빈이 실없이 웃었다. 운명 같은 첫사랑이 찾아온 것만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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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 평생 처음으로 썸이란 걸 타보겠거니 확신한 것이 부끄럽게 은우와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전공이 달라 학교에서 자주 마주치기는 어려웠으나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데다 알고 보니 동갑이기까지 해 이정도면 운명이 분명하다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친구로서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마어마한 친목을 쌓은 셈이었지만 연인으로서의 기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시간을 맞춰 함께 식사하고, 종종 영화도 보러 다니고, 도서관 귀퉁이에 나란히 앉아 몇 번 같이 공부한 그 정도. ‘친한 친구’에서 멎어버린 관계에 한껏 기대했던 빈의 속만 알게 모르게 문드러졌다. 친해지고 싶다던 소기의 목적이 진심이었을 줄이야. ‘으누’. 때마침 반짝거리며 화면을 밝힌 메세지 알림에 빈이 뚱한 표정으로 내용을 확인했다. 
 
 
‘비니 어디?’
‘아직 학교면 영화볼래?’
‘사실 이미 예매해뒀어 ^^’
 
 
그러니까, 매일같이 굳이 시간을 내 만나서 소소하게 얘기를 나누고, 새로 개봉한 영화는 꼭 둘이서 챙겨봤으며 영화를 보고서는 은우가 알아온 맛집에서 기분 좋게 식사까지 하는데. 그저께는 집까지 데려다줬는데. 이게 그냥 친구인지 아니면 연인으로 넘어서는 서막일지 빈은 아리송했다. 그 외모에 성격마저 젠틀한 은우라 언제 어디서나 인기몰이를 한다던 K군의 말이 떠올랐다. 심지어 은우를 앓는 팬클럽 페이지까지 페이스북에 생겼다고. 끈질긴 검색 끝에 페이지를 찾아낸 빈은 그 집단의 진정성에 기함하고야 말았다. 활동이 잦은 그 페이지에는 제가 모르던 몇 개월간의 은우의 흔적들이 남아있어서 빈은 치밀어 오르는 질투에 밤새 끙끙 앓아야 했다.(물론 사진은 전부 저장했다. 배경화면도 몰래 바꿨다.) 이렇게 인기가 많고, 저렇게 다정하다는데 그럼 데이트 비스무리한 이것들도 나랑만 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까지 들자 맥이 빠졌다. 
 
 
‘ㅇㅇ’
‘정문으로 감’
 
 
괜히 심통이 나 평소보다 간결해진 답신에 제 좁은 속이 고스란히 내다보이는 기분이라 빈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모든 게 처음인 저와 달리 은우는 전부 익숙해보여서, 익숙하다 못해 능숙해보여서 별 시덥잖은 걱정까지 다 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조바심 내지 말아야지. 그러나 언제까지고 ‘아직’일 것만 같은 불안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가만 보면 은우는 정말로, 저랑 ‘친구’ 같은 거나 오래도록 할 작정인 듯 하니까. 땅이 꺼질듯 한숨을 내쉬었다. “야, 너무 당기기만 하면 질려. 가끔은 좀 밀어주기도 하고 그래야지.”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홀라당 넘어가 허우적대는 저에게 명준이 핀잔처럼 던진 조언이 떠올랐다. 그러나 밀당이란 건 빈에게 하염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좋으면 당기고 싫으면 미는 거지, 어떻게 좋아서 죽을 것 같은 사람을 밀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요새 내도록 느끼는 바지만 연애라는 것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밀당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와중에도 영화보자는 은우의 말에 파워긍정의 메세지를 남긴 빈은 타고나기를 단순한 성정의 인간이었기에 그만 밀당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럼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빈아!”
 
 
때마침 멀찍이서 은우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오늘은 흰 셔츠에 슬랙스 차림이다. 꾸며 입은 것이 아닌데도 얼굴 버프를 받아 훨훨 나는 멀끔한 차림에 빈이 괜히 후드티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렌즈라도 끼고 오는 건데. 몇 시간 전에 닦았음에도 여전히 희뿌연 것만 같은 안경을 벗어든 빈이 소매춤으로 알을 대충 문질렀다. 바로 날아오는 핀잔에 훌쩍 다가온 은우에게 안경을 건네고 말았지만.
 
 
“그렇게 닦으면 흠집 난다니까.”
 
 
친해져보니 차은우는 타고난 잔소리꾼이었다. 차은우를 제외한 것들에는 대체로 무신경해 종종 삐끗하는 문빈을 잡아주는 게 오로지 본인의 몫이 된 이후로는 본색을 숨기지 않고 잔소리를 해댔다. 신발끈을 묶고 다니라느니, 걸음을 허투루 떼지 말라느니 하는 핀잔들이 대부분이었다. 술만 들어가면 개가 된다는 이유로(물론 은우는 이를 순화하여 말하긴 했다. 넌 많이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타입이라 걱정이 된다고.) 금주를 권하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생이냐며 귀찮은 양을 열심히 연기했으나 걱정 서린, 혹은 웃음기가 스민 말들을 전한 후 불쑥 내려앉아 끈을 대신 묶어주거나 팔을 붙들어오는 손길에 심장이 뜀을 빨리하곤 해 빈은 그럴 때마다 은우의 시선을 피하는 쪽을 택했다. 이번에도 빈의 반경으로 가깝게 다가온 은우는 안경을 조심히 들더니 가방 앞주머니에서 가지런히 개어진 안경닦이를 꺼냈다. 자리에 우뚝 멈춰서 세심하게 안경알 위의 티끌을 닦아낸 은우가 됐다, 하며 안경다리를 펴 빈에게 씌워주었다.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말갛게 웃는 얼굴이 가득 들어차 잠시 숨이 헙 멎었다. 겨우 어색하게 따라 웃으니 시선을 맞춘 은우가 얼른 가자며 빈의 소매를 끌며 재촉했다. 네가 그 때 보고 싶다고 했던 거 있잖아. 그 영화 오늘 개봉했길래. 다정한 말을 또 던져 빈은 그냥 애써 올린 입매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까, 은우가 이렇게,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정도로 다정하게 굴 때. 목 끝까지 넘실거리는 다정함이 숨통을 죄어오는 기분이 들 때마다 우리가 진짜 뭐라도 된 것만 같아서 더 비참해지곤 하는 것이다. 타고나기를 다정함이 몸에 벤 은우에게 이 정도는 예사일 텐데 번번이 흔들리고 마는 제가 한심해서. 혼자 하는 사랑을 시작하고서 롤러코스터를 탄 듯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감정이 급속도로 하향세를 탔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삐죽 나온 입술을 숨기려 빈이 입 안 여린 살을 씹었다. 
 
 
저보다 더 들뜬 듯 보이는 은우가 몇 마디고 말을 걸어도 단답으로 응수하자 곧 평소와 다름을 감지했는지 그는 금세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빈의 손목을 쥔 손가락만 둥글리던 은우가 팝콘통을 빈에게 건네며 말을 묻는다. 
 
 
“안좋은 일 있었어?”
“…아니.”
“아님 배고파? 뭐 먹고 나서 볼까?”
 
 
너는 대체 왜 나에게 매번 치사량의 다정을 건네는지. 그 말에 참지 못하고 혀끝을 맴돌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야. 너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래?"
 
 
"어?"
 
 
삑사리까지 나 볼품없어진 제 말을 못 들었는지 은우가 반문한다. 걱정이 서려 좁혀진 미간은 빈은 시선을 툭 떨궜다. 동시에 근거리에서 웅웅 진동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주머니에 있을 제 폰을 더듬었으나 아무 느낌도 없는 걸 보아 은우에게 걸려온 전화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폰을 꺼내들고서는 금세 난감한 낯이 된 은우가 빈아 잠시만, 양해를 구하고 조금 떨어져 전화를 받았다. 누나. 하는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간간이 벽에 부딪혀 울렸다. 제가 화낼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은우는 빈에게 늘 최선을 다했으니까. 알면서도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빈은 그저 입술만 꾹 감쳐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통화를 마무리한 은우가 다가와 얘기를 계속 하자는 양 경청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까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심사가 제대로 뒤틀린 빈은 그 말에도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감정이 말을 듣지 않아 자꾸만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게 있었다. 영화 너 혼자 봐. 들고 있던 팝콘을 내던지듯 은우의 품에 안기고 빈이 빠른 걸음으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당황해 할 말을 찾는 듯 달싹이던 입술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미 제 손으로 끝낸 일이었다. 섣부른 감정에 휩쓸린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은우에게 제멋대로 화풀이를 한 것도 전부 본인이었으나 뻗칠 대로 뻗친 분노는 은우를 겨냥했다. 목구멍에 먹먹하니 묵직한 게 턱 걸렸다. 
혹여 은우가 따라올까 걸음을 빨리한 것이 무색하게 건물 앞에서 한참 숨을 고르고 난 후에도 은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숨이 불규칙적으로 흩어졌다. 눈가에 뜨겁게 열이 오르더니 이내 겉잡을 수 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허엉, 헝 소리를 내며 울며 집까지 터덜터덜 걸음한 빈이 현관문을 닫고 나서야 바닥에 주저앉았다. 
 
 
멋대로 시작한 첫사랑의 숨통이 끊어졌다. 좀 더 멋지고, 어른다운 사랑을 하고 싶었는데. 스무 살이 되어서도 저는 아직 서툴기만 해 모든 걸 망쳐놓고야 말았다. 은우와는 이제, 영영 끝이다. 잘 먹어서 보기 좋다는 말을 건네는 나즈막한 목소리를 귀에 담는 것도, 영화가 끝난 늦은 시간에 밤길을 걸으며 자꾸만 스치는 손등에 설레하는 것도, 책을 읽느라고 내리깔린 눈을 덮은 속눈썹을 몇 시간이고 엿보는 일도. 빈이 손등으로 눈가를 덮었다. 후두둑 떨어진 눈물이 동그랗게 바닥을 적셨다. 
 
 
 
 
 
 
 
 
-
 
 이후로는 무작정 도망이었다. 되는대로 은우를 피해다녔다. 수업을 듣거나 친구들과 어울릴 때를 빼고는 퍼질러 자는 게 일과의 전부인 저와 다르게, 은우는 시간을 따로 내지 않는 이상 우연히 마주치기조차 힘들 정도로 바쁜 몸이었기에 은우와의 관계를 끊어내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일주일 남짓의 시간동안 은우에게서 연락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매일같이 문자며 전화가 날아왔다. 빈아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나랑 얘기 좀 해주라. 어디 아픈 건 아니지? … 답장이 없음에도 하루에 한 두 번은 꼭 날아오던 문자는 이틀 전을 기점으로 멎었다. 빈이 한 방향으로 기울어진 말풍선을 가만 보다 화면을 껐다. 얼굴을 보지 않으면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잘생긴 얼굴은 하루 온종일 머릿속을 둥둥 떠다녀 빈을 괴롭히곤 했다. 
 
은우와 함께 들렀던 식당, 스치는 팔꿈치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느라고 글자 하나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도서관 귀퉁이 책상, 속에서 번번이 맞닿는 손끝이 좋아 꼭 팝콘을 한통씩 사들고서 들어가곤 했던 학교 앞 작은 영화관. 어딜 가나 은우의 생각이 나 고역인 건 날이 조금 선선해질 때가 되면 조금 가라앉을까. 빈이 음료캔에 송글송글 맺힌 물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우의 이름만 덧그려도 가슴이 조금, 사실은 여전히 많이 시큰거렸지만 제 사랑도 흔히들 입에 올리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에 부응할 빤한 종류일 거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을 다지던 그때였다.
 
 
“자꾸 만지면 상처 덧난다니까.”
 
 
손목에 서늘한 손가락이 감겨와 까딱거리던 발목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익숙하도록 시원한 체온이다. 습관적으로 모기에 물린 자리를 건들려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숨이 가빠와 빈이 입술을 꾹 다물고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은우가 있었다. 
 
 
“오랜만이지.” “…….”
“얘기 좀 하자.”
 
 
놀라 몸을 뒤채니 손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뿌리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빈이 응, 한 음절을 겨우 소리 내 발음하고서 은우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따라 밟았다. 한적한 곳에 다다르자 은우의 발이 멈춰섰다. 천천히 돌아본 은우는 또 천천히 입을 뗐다.
 
 
“너 그렇게 나가고 나서, 빈아.”
“…….”
“처음엔 화가 났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나랑 대화로 풀어줬으면 했는데, 내가 너한테 그 정도로 못미더운 사람이었나, 가벼워보였나 싶기도 하고.”
“…그런 거 아니야.”
“근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무서워지더라. 너랑 나랑 이렇게 끝이면, 네가 날 영영 안 보겠다고 하면...”
 
 
말과 말 사이의 휴지가 길어졌다. 은우가 감정을 가다듬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차근히 말하는 목소리가 간간이 떨려와 빈은 또 무작정 오해하고 싶어졌다. 며칠간의 노력이 부질없게 은우의 앞에 서자 다시금 살아나는 감정에 빈이 눈물을 참으려 주먹을 꾹 쥐었다.
 
 
“그냥, 그냥...... 나한테 신경 안 쓰면 안돼?”
“빈아, 내가 어떻게 그래.”
 
 
널 좋아하는데. 그 말은 꿈결처럼 흩어져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너도, 나를. 빈이 푹 수그렸던 고개를 들어 은우를 마주했다. 결연한 눈은 그럼에도 참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어서, 빈은 뭐에 홀린 듯이 은우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손을 올려 눈물이 번진 볼을 쥐고 입술을 포갰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샜다. 놀라 동그래진 눈은 손바닥으로 사뿐히 감겨주고 빈도 그를 따라 눈을 꼭 감았다. 은우가 곧 흐름을 잡고 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한편으론 손을 들어 커다란 엄지로 빈의 눈가를 훑자 참았던 눈물이 묻어나 은우가 빈을 안은 팔에 힘을 더해 몸을 바짝 붙였다. 눈꺼풀에 가로막힌 시야는 캄캄했으나 혀가 엉키는 순간마다 불꽃놀이를 하듯 번쩍 번쩍 물들어 눈가에 뜨끈하게 열이 오른 기분마저 들었다. 첫키스를 하면 귓가에서 종이 울린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다. 젖은 살덩이가 얽혀 축축한 소리만 들렸으니까. 숨이 부족해질 때까지 맞붙어있던 입술이 한참 만에 떨어지고, 곧바로 빈이 은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은우야, 나도. 나도 좋아해. 좋아해서 그랬어. 늦어서 미안해. 두서없이 뱉어지는 말에 은우가 작게 웃었다. 빈의 등허리를 쓰다듬던 손은 이내 동그란 뒷통수에 올라앉았다. 가만 끌어안고 달큰한 숨을 들이켰다. 
 
어린 연인들의 밤이었다. 

 

계간은콩 2019 여름호 line up list
<fake and slash> - 보노 / 풋사랑
<오아시스> - 로빈 / 모닝콜
<초롱초롱> - SIN / 장화신은 고양이
Spring Up 후기
<'로맨틱' 코미디입니다만> - 모구 / 불꽃놀이
<유하(維夏)> - 몬트 / 숨가빠
<같이 갈래> - 다로 / 북극성
<물론 나도 할 생각이었지만> - SIN / 내멋대로
Summer Vibes  후기
<처음이 어려운 법이죠> - 맥거핀 / 고백
<우연적 필연> - 얌 / 물들어
<차은우와 이동민의 우울> - 우주대통합 / 별
Autumn story 후기
<열대야> - 담 / 붙잡았어야해
Winter Dream 후기
<베이비!> - 풍선 / Baby
<Smile baby> - 소빈 / 니가 웃잖아
<이제 알았어> - 확대경 / 너라서
<한여름 밤의 꿈> - 심 / Dream Night
<Bon voyage> - 달함 / I'll Be There
<안 좋아해> - 걤쟤 / 다 거짓말
<good night sweet dream> - 연날 / Every Minute
Dream Part.01 후기
<열대야> - 딸기우유 / With You
<니가 불어와> - 무한 / 니가 불어와
<황혼의 시간> - 온더 / Butterfly
<스무살의 순간> - 슈가빈 / Run
<전생몽(前生夢)> - 베디 / 어느새 우린XReal love
Dream Part.02 후기
<늦어서 미안해> - 사런 / 너잖아
<매쉬메리골드> - 우쥬 / 너의 뒤에서
<너의 기억 속에서 외친다> - 온기 / 외친다
<그렇게 우리는> - 은죽빈살 / 내 곁에 있어줘 (Stay with me)
Rise Up 후기
<오드> - 사런 / Starry Sky
<All Night> - 초록 / All Night (전화해)
<Moonwalk> - 틈 / Moonwalk
<Treasure> - 차주 / Treasure
<은닉> - 망간 / Role Play
<별후광음(別後光陰)> - 몬트 / 1 in a million
<그날의 강> - 에스 / Love Wheel
<Heart Brew Love!> - 제니 / Heart Brew Love
<피어나> - 퐁 / 피어나 (Bloom)
All Light 후기
<Hanasake Mirai> - 차주 / Hanasake Mirai
<네 곁에 있을게> - 물뿌 / I`m On Your Side
Venus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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