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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

 

 

w.로빈

 

 

눈이 먼지처럼 날리는 한겨울의 밤이었다. 빈이 시끌벅적한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온갖 빛이 가득한 곳이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빈은 빨간 목도리를 커플로 맞추고 두 손을 꼭 잡은 연인과, 시험이 끝나 여전히 쌩쌩히 걸어 다니는 학생들과, 같이 장을 보는 부부를 지나쳤다. 빈이 지나간 자리로는 옅은 비린내가 맴돌았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음식 냄새가 나는 탓에 사람들은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빈이 한 손에 지갑을 들고 두리번거리는 남자와 부딪혔다. 비린내. 남자가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는 냄새를 기억해내려 인상을 찌푸렸다. 빈이 뒤로 밀려난 남자에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예, 죄송합니다. 어디 다친 데는…?”

 

 

 

남자의 눈앞에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만이 있었다. 남자가 고개를 드는 사이 빈은 분주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남자가 멍한 상태로 중얼거렸다.

 

 

 

“피 냄새…….”

 

 

 

빈은 캄캄한 작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만취한 채 넥타이를 이마에 두른 회사원과, 매일 시장 길바닥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장님인 체 구걸을 하던 거지와, 골목의 골목에서 격한 사랑을 나누던 연인을 지나쳤다. 골목 안쪽에는 ‘은희’, ‘경숙’, ‘예진’과 같은 여자이름이 쓰인 간판을 매단 식당들이 즐비했다. 모두 불이 꺼져있었다. 오로지 가로등 하나만이 골목을 비추었다. 빈이 고개를 뒤로 돌려 훤히 밝은 거리를 쳐다봤다. 몇 초간 빛을 응시하던 빈은 컴컴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작은 생채기가 난 왼손에는 아까 전 부딪친 남자의 지갑이 들려있었다.

 

 

 

 

 

 

 

「흑과 백」

 

 

 

 

 

 

 

빈이 ‘은희’, ‘경숙’, ‘예진’ 중 ‘은희’의 문으로 들어갔다. 불은 꺼져있지만 문이 닫혀있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흔하게 범하는 일반화의 오류였다. 또 세 건물은 모두 지하로 이어져있었다. 그래도 빈은 ‘은희’의 문을 선호했는데 이유는 골목의 출구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었다. 빈이 담배연기가 자욱한 가게에서 커다란 거울을 찾아 옆으로 밀었다. 지하로 통하는 시멘트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빈이 왔니?” 가게 평상에서 분홍색 요를 깔아놓고 담배를 피우며 고스톱을 치던 여자가 물었다. 상대는 머리를 빡빡 깎고 검은 양복을 대충 걸친 남자였다. “예.” 빈이 짧게 대답하고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기침했다. 담배연기가 독했다.

 

 

 

“오빠!”

 

 

 

아침만 해도 긴 생머리가 등허리까지 오던 성연이 짧은 단발머리로 빈을 반겼다. 성연은 이제야 열여덟이었다. 열다섯을 넘겨 이 곳에 있는 여자아이는 성연 혼자였다. “머리 경은이모가 잘라줬다!” 짧아진 성연의 머리카락을 한 번 만져본 빈이 성연에게 손에 쥐고 있던 지갑을 건넸다. 오! 감탄사를 내뱉은 성연이 지갑을 이리저리 살폈다. 빈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성연에게 말했다.

 

 

 

“애들이랑 뭐라도 사먹어.”

“오빠도 훔친 거면서 자기 것처럼 말한다. 현금 육만 칠천… 이백 원!”

“현우랑 찬이는?”

“자. 새끼들 오늘 일 좀 했다고 오자마자 죽는 거 있지. 씻지도 않고, 더럽게.”

“너도 자.”

“겨우 아홉시인데?”

 

 

 

성연이 입술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아홉시. 아홉시라구. 은우오빠도 안 일어났단 말이야.” “그럼 혼자 깨 있던가. 나 잔다.” 빈이 성연을 지나쳐 샤워실로 향했다. 성연이 침묵 속에 편의점에 가려 계단을 올랐다. 발소리를 죽이는 것은 오랫동안 주입된 교육의 결과물이었다. 빈이 그 조그만 뒷모습을 쳐다보다 다시 샤워실로 걸어갔다.

 

 

 

빈은 지하실에서 팔 년을 보낸 유일한 스물이었다. 열넷에 이 곳에 왔다. 그러니까 이 곳이 어떤 곳이냐 하면, 빈의 유년시절을 전부 갖다 바친, 아주 추악하고, 더럽고, 끔찍한 곳이었다. 빈도 얼굴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는 제일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을 아이들은 ‘엄마’라 불렀다. 이 곳은 딱히 불리는 이름이 없었다. 은희라 부르면 은희가 되고, 경숙이라 부르면 경숙이 되는 그런 곳이었다. 이 끔찍한 곳을 빈은 지옥이라 불렀다.

 

 

 

보통 여기서는 이러한 일들을 했다. 열두 살 언저리의 아이들을 어디선가 데려와 지옥에서 3년을 버티고 첫 일을 받게 한다. 3년 동안 버티지 못하면 죽는다. 탈출도 할 수 없다. 첫 일을 지시받는 아이들은 채 다섯이 되지 않는데, 신체부위 중 하나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손가락 한 마디나 귀 따위의 것 말이다. 대체로 일을 수행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남의 것을 가져오거나, 자신의 것을 바치거나. 남의 것을 가져가는 것은 또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길거리 아무나 골라 떼 오는 것과 같이 자란 친구의 것을 가져오는 것. 가져가지 못하면 죽었다. 여기까지가 빈이 지옥에서 보고, 듣고, 직접 수행한 것들이었다.

 

 

 

빈은 열넷에 바로 지옥으로 왔다. 아버지가 도박꾼이었다. 부자는 도박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빈을 딱하게 여긴 도박장 운영인은 낮에 빈이 이 곳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했다. 아버지 잘 못 만난 게 죄지. 고스톱 할 때 깔던 초록색 천을 이불처럼 덮어주며 꼬르륵 소리를 내는 빈의 배를 토닥였다.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더 이상 걸 게 없던 아버지는 아들을 걸었다. 그저 지켜보던 빈은 그렇게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와 이별했다.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빈은 속으로 삼켰다. 저를 데려가는 아저씨가 무서워서였다. 아빠, 내가 무얼 잘못했지요? 나는 어디로 가게 되나요? 그렇게 도착한 곳은 여기였다. 얼떨결에 칼을 잡았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밥을 줬다. 그 때는 어쩌면 이곳이 도박장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조금 젊었던 지상의 여자가 담배를 피우며 첫 임무를 내려주었다. 단도를 건네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빈과 동갑인 아이들은 셋이 있었는데, 전부 남자였다. 하나는 곧바로 지상으로 뛰쳐나갔다. 누군가에게서 앗아 올 모양이었다. 빈과 남은 한 명의 아이는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소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난 내 걸 가져갈래.”

“왜? 다른 사람 걸 가져오면 되잖아.”

“슬퍼할 걸. 은우 형도 한쪽 귀 안 들리지만 잘 살아.”

“그렇지만 많이 아플 거야.”

“잘리는 사람도 많이 아플 텐데.”

“어쩌면 죽을 수도 있어.”

“죽는 게 더 나을 지도 몰라.”

 

 

 

말을 주고받았다. 끊긴 대화에 흐르는 침묵이 싫어 소년이 밖을 눈짓하며 빈에게 물었다. “넌 우리보다 밖에 오래 있다 왔지? 얼마나 환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아.” “거짓말.” “진짜야.” 빈이 회색 계단에 걸터앉았다. 손에 쥐어진 단도의 날을 검지로 쓸었다. 소년은 빈의 앞에 서 두 손을 내밀었다. “자 봐.” 빈이 두 손을 빤히 쳐다보다 그 애를 올려다봤다. 소년이 말했다.

 

 

 

“나는 손이 두 개야.”

“나도 두 갠데.”

“넌 아픈 것 싫어하지?”

 

 

 

빈은 입을 꾹 다물고 소년을 쳐다봤다. 아이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안 된다고,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고통이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소년이 칼을 높이 들었다. 빈이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무엇을 했는지도 몰랐다. 순식간에 머리가 하얘졌다. 누군가 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했어. 소년이 흰 수건을 적셨다. 축하해, 빈아. 열다섯이야. 곧 입을 다물었다. 현이 눈을 감았다. 현아. 현아. 빈이 그 애를 불렀다. 두 살이 많았던 형이 현을 데려갔다. 열다섯 소년이 눈물을 삼키는 방법은 침묵이었다. 아직, 대답 못 했는데.

 

 

 

잠에 드려는 캄캄한 밤마다 그 애가 찾아왔다. 양 손을 모아 등허리 쪽에 깔고 누웠다. 빈이 누워있다 고개를 돌리면 현은 눈앞에서 특유의 무표정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어때?" 뭐가. 뭐가. “나 대신 살아있는 기분.” 빈이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왜 그 때 안 된다고 안 했어?"

 

 

 

난… 나는…. 빈이 입술을 벙긋벙긋 움직였다.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 은우 형 보고 현이 데려가지 말라고 안 했어?"

"현아, 나는…."

 

 

 

현이 빈의 눈앞으로 검은 두 손을 들어올렸다. 열다섯 소년의 두 볼이 축축해졌을 때 스물의 빈이 눈을 떴다. 숨을 몰아쉬었다.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샤워실이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물에 축축이 젖어서는 몸을 덜덜 떨었다. 더 이상 열다섯은 아니었지만, 끝내 울었다.

 

 

 

 

 

 

 

빈은 도망치듯 샤워부스를 빠져나왔다. 현의 생각이 날 때마다 죽어버리고 싶었다. 물기를 대충 닦고 속옷과 반바지만 입은 채로 샤워실 안 의자에 앉아있었다. 쭈글쭈글해진 양 손을 쳐다봤다. 손가락이 몸에 붙어 있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빈이 옷가지가 걸려있던 곳을 쳐다봤다. 위의 티를 가져오지 않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로 수건을 목덜미에 대충 건 채, 운동화를 꺾어 신고 방으로 향했다.

 

 

 

이런 걸로 밥을 빌어먹고 사는 것에 환멸을 느낀 것도 그 때부터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일했지만 양지를 지향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갈수록 지쳐갔고, 때로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죄책감이 밀려왔다. 현이 이기적이었던 저를 데려가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낮에는 칼을 쥐었고 밤에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신이 있다면, 저를 제발 이 지옥에서 구해주세요. 이중적인 자신을 혐오한 나머지 가끔은 위험을 자처하기도 했다.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졸았고, 욕조에 들어앉아 물을 들이킬 때까지 잠수했다. 그러나 빈은 죽음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 빈의 손목이 잡혔다. 손에는 검은 긴팔 티가 쥐어졌다.

 

 

 

“아까, 씻으러 갈 때 윗옷 안 들고 가더라.”

 

 

 

검은 모자를 쓴 은우가 제게 건넨 것이었다. 빈의 목덜미에 걸쳐져 있던 수건이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몇 년 전부터 빈이 죽고 싶었던 이유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던 것은, 제게 죄책감 한 덩어리는 더 떠안겨준 은우가 더 이상 밉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현을 제 손으로 옮긴 장본인이었다. 며칠 동안 앓던 현의 숨이 멎었을 때 미련 없이 그 앨 안아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제게 그렇게 다정하게 구는 걸까. 좆같게. 빈에게 옷을 쥐어 준 은우가 모자를 고쳐 쓰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빈이 티셔츠를 수건 위에 떨어뜨렸다. 방으로 들어가 다른 티를 꺼내 입고 침대에 누웠다.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신이 있다면, 제발 저를 이 지옥에서 꺼내주세요. 구원해주세요. 뛰는 심장소리를 애써 감추려 베개를 껴안았다. 잠에 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어쩌면 밤새 벌을 받는 것일지도 몰랐다.

 

 

 

 

 

 

 

새벽에는 은우가 들어왔다. “자?” 컴컴한 방은 오직 둘만이 쓰는 방이었다. 빈은 낮이었고, 은우는 밤이었기 때문에 침대는 하나로 충분했다. 은우가 빈이 누워있는 침대 한 구석에 걸터앉았다. 벽을 보고 누워있는 빈의 어깨를 토닥였다. 빈이 눈을 깜빡였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빈이 갈라지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러지 마.”

 

 

 

한 쪽 귀로 꽂히는 빈의 목소리에 은우가 멈칫하더니 손을 거두었다. 미련이 남아 침대 매트리스를 두드리는 손가락은 표현하지 못하는 애정이었다. 빈이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쿵쿵. 머리가 울렸다. 은우가 컴컴한 시멘트벽을 바라보며 평소와 같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물을 받았어.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엄마가 날 나가 살 수 있게 해준대.”

“…….”

“그러니까 빈아,”

“닥쳐.”

 

 

 

빈이 은우의 말을 날카롭게 막고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은우가 놀라 빈을 쳐다봤다. 복도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에 희미하게 보이는 얼굴은 입술이 찢어져있었다. 맞았니. 묻고 싶었지만 속으로 삼켜냈다. 이러면 안 돼. 표현해서는 안 되는 애정이었다. 내보여서는 안 되는 단 하나의 약점이었다. 빈이 뻑뻑한 눈으로 은우를 노려봤다. 은우가 입술을 열려는 찰나였다. 빈이 더 빨랐다.

 

 

 

“어젯밤에도, 그젯밤에도 계속 현이가 나를 불러.”

“빈아.”

“더 죽고 싶어지는 건 뭔지 알아? 나는 이렇게 자랐는데, 내 꿈속에서 걔는 항상 열다섯이야. 자라지도 못하고 여길 맴돈단 말이야.”

“…….”

“나 진짜 어떡해…….”

 

 

 

빈이 말끝을 흐리며 울먹였다. 밤이면 항상 찾아오는 그 날의 기억이 익숙해지는 게 무서웠다. 두려웠다. 현이 저를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것이 당연한 일이 된다는 게. 더 이상은 안 돼. 그 애는 빈에게 남겨진 마지막 죄책감이었고, 감춰야만 하는 나약함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졌고 눈이 따가웠다. 빈이 욕설을 내뱉었다. 은우가 눈을 비비는 빈에게 천천히 말했다.

 

 

 

“너 더 이상 열다섯 아니야.”

“그래서 어떡하라는 거야?”

“잊어. 생각하지 마. 걔 스스로 선택한 거야.”

“그리고 난 그 잘못된 선택을 방관했고.”

“야.”

 

 

 

빈이 따끔거려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은우가 가까이 다가왔다. 빈의 오른손 손목이 잡혔다. 사람의 손길은 아니었다. 현이니. 검은 손자국이 빈의 손목을 타고 올라와 목을 졸랐다. 은우는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빈 옆에서 말했다. “빈아, 나랑 같이 밖으로 나가자. 나가서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으로…….” 빈이 눈이 발개진 채로 비릿하게 웃음 지었다.

 

 

 

“정상?”

“…….”

“너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침묵했다. 열다섯의 소년이 눈물을 삼켰고, 스물 둘의 은우는 한숨을 삼켰다. 밖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빈이 오빠! 안 일어났어?” 성연의 목소리였다. 은우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빈을 쳐다봤다. 빈이 그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은 은우의 입에서 끈적하게 흘러나왔다.

 

 

 

“때리고 싶음, 맞아줄 수 있어.”

“뭐?”

 

 

 

빈이 황당하다는 듯 은우를 쳐다봤다. 은우가 말을 꼭꼭 씹으며 뱉어냈다.

 

 

 

“나는 네가, 날 딱 죽기 직전만큼 아프게 해도 괜찮을 거야.”

“…….”

“난 너 사랑해.”

 

 

 

은우가 참았던 눈물을 떨어뜨렸다. 주먹을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처음이었다. 제 마음을 고백한 것은. 빈이 떨리는 은우의 주먹을 보더니 시선을 위로 올렸다. 은우와 눈을 마주친 빈은 한 쪽 입꼬리를 올리고 물었다.

 

 

 

“그게 사랑이니?”

“…….”

“때리면 맞고 괴롭히면 버티는 거, 그게 사랑이야?”

“그러면 뭔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뭔데?”

“돌았어, 넌.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지. 그게 아니면 어떻게 나를…….”

 

 

 

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 순간 은우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갑작스런 소리들이 귀를 통해 흘러들어와 은우의 뇌를 찔렀다. 남은 귀마저 문제였다. 모든 것을 지켜보던 빈은 잠시 멈춰있었다. 제가 제일 편할 수 있는 다음 행동. 회피. 괴로워하는 은우를 뒤로하고 빈은 이를 악물고 밖으로 뛰었다. 제 잘못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눈물이 났다. 은우가 침대 위에서 몸부림을 치면서도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숨을 몰아쉬며 빈을 쫓았다. 비틀거리면서도 시선은 빈을 쫓았다. 휘청거렸지만 그래도, 그래도…….

 

 

 

검푸른 하늘이 빈을 골목 깊숙이 밀어냈다. 오로지 티셔츠 한 장만 입어 휑한 목덜미에 차가운 눈이 닿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흰 입김이 여기저기 시야를 흐리게 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골목 주택가 벽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내려왔다. 맨손으로 눈이 쌓인 땅을 짚고는 철퍼덕 주저앉았다. 손이 빨갛게 얼었다. 턱이 아렸다. 눈앞엔 검은 손이 아른거렸다. 아아, 현아…. 열다섯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빈이 눈을 감았다. 현아, 미안해, 눈을, 마주할 수가,

 

 

 

“빈아!”

 

 

 

빈이 눈을 반쯤 뜨고는 앞을 쳐다봤다. 벽. 고개를 돌려 골목 바깥쪽을 쳐다봤다. 차은우. 은우가 빈의 코트를 들고는 빠르게 걸어왔다. 저도 티셔츠 한 장만 입고서는 코끝이 빨개진 채 앉아있는 빈을 일으켜서는 어깨에 코트를 걸쳤다. 빈이 주먹을 꽉 쥐고서는 부들부들 떨었다. 언 입술을 간신히 열어 얼음 같은 말을 내뱉었다.

 

 

 

“추워.”

“안아줄게.”

“무서워.”

“눈 가려줄게.”

“…….”

“손도 잡아주고.”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빈이 은우에게 안겼다. 목덜미 부분에 얼굴을 묻었다. 은우의 왼쪽 어깨가 젖어들었다. 은우가 빈의 주먹을 펴 손을 잡았다. 어둠 사이에서 온갖 따뜻한 것들이 전해졌다. 빈이 고개를 들어 은우의 등 뒤를 응시했다. 열다섯 작은 소년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년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눈을 깜빡이며 지켜봤다. 전부. 빈이 은우의 왼쪽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난 너 못 때려. 못 괴롭혀. 네가 맞아.”

“뭐라고?”

 

 

 

빈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신이 있다면, 우리를 구원해주세요. 이 어둠 속에서. 왜냐하면 우린…….

 

 

 

“미안한데, 나 안 들려 빈아.” 은우가 눈을 살짝 내리깔고 말했다. 빈이 은우의 왼쪽 귀에 살짝 입술을 맞대고는 곧바로 떼어 은우의 얼굴을 쳐다봤다. “미안해할 일 아냐.” 그리고 말을 이었다.

 

 

 

“우리 도망갈까?”

“어디로?”

“빛으로.”

 

 

 

그 날 새벽, 남자 둘은 검푸른 하늘 사이로 걸어 나왔다. 눈이 내렸고 골목은 온통 희게 변하고 있었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둘 역시도 하얗게. 둘은 낮과 밤, 빛과 어둠, 흑과 백에서 도피했다. 목적지는 사랑이었다.

 

 

 

네 말이 맞아. 사랑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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