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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미주의

 

 

w.charish

 

 

 

침대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거울을 보는 것이다. 거울을 보고는 옷을 갈아입는다. 그러고 나면 갈아입은 옷을 추스렸다. 어디 구겨진 곳은 없는지, 실밥이 튀어나온 곳은 없는지. 각 잡아 옷을 정리하고 난 뒤엔 대본을 챙겼다. 대사가 잔뜩 뒤엉킨 허연 종이 뭉치를 몇 번 뒤적거리다 보면 때 맞춰 누군가가 들어오는 게 당연한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누군가는 제 연기 선생이기도 했다가, 유명 배우이기도 했다가, 어떨 땐 이름 난 기업의 차남이기도 했다. 확실한 건, 그들은 전부 다 능력이 좋았으며, 방 한 켠에 놓인 침대 위에서 굴렀다는 것이었다. 종종 침대에서 구른 뒤 빈에게 던지듯 내민 대본 뭉치들도. 지나치게 일상적이라 다를 게 하나 없는 일들이었다.

그렇게 일상적인 하루에 던져진 돌이 가져온 파동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원래 빈은 웃지 않았다. 본디 웃음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가 바르작거리며 웃거나, 울거나, 또는 신음하거나, 하는 시간은 단 하나. 침대 위에 있을 때 뿐이었다. 그마저도 누군가 찾아오지 않는 날에는 하루종일 드러누워 잠을 청하거나, 대본을 외우거나, 외출을 했다. 거의 대부분이 외출이었다. 외출을 하면 열에 아홉은 데뷔 전 다니던 연기학원으로 향했다. 빈은 꽤나 각광받는 신인 배우였기 때문에, 학원에 가면 모든 사람들이 반겼다. 단 한 사람, 누군가만 빼고 말이다.

그 누군가는 배우 지망생이었으며, 연기를 매우 잘했다. 다방면에서 탁월했다. 제 연기에 감정을 집어넣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빈이 학원에 가는 이유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남자는 말로 형용하기엔 좀 미안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잘생겼다. 선이 짙은 눈매에 짙은 눈동자, 남자다운 진한 눈썹,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 그리고 와인빛 보다는 약간 톤 업 된, 결 좋은 머리칼까지. 누구나 남자를 보면 말했다. 그리고 빈 또한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잘생겼다.

 

빈 때문에 사람이 모여 소란스러운 연습실 안에서 빈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양해를 구하고는 조심스레 빠져나왔다. 잠시 복도에서 두리번거리다 익숙하게 다른 연습실을 찾아나선다. 철컥, 쇳소리와 함께 빈이 문을 열었다. 빙고. 안에서 격양된 감정으로 고함을 치는 연기를 하고 있던 누군가가 멈칫하며 빈을 바라보았다. 짜증스러운 얼굴이었다. 왜 왔냐는 듯 한, 마치 불청객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태도였다.

 

 

 

 

 

 

 

 

 

 

"저기, 차은우씨."

 

"......."

 

"그, 왜 저 오면 다른 연습실로 가시나, 해서요."

 

"제 마음인데요."

 

 

 

 

 

 

 

 

 

 

얼굴에 적대감과 경멸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빈이 몇 걸음 다가가자 말을 섞기도 싫은 듯 남자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난다. 오늘도 빈을 피해 빈 연습실로 옮겨간 탓에 넓은 연습실 안에는 남자와 빈, 둘 뿐이었다. 빈의 자존심이 저 아래로 추락했다. 눈에 불꽃이 튀며 얼굴이 싸늘해졌다. 애써 얼굴 표정을 풀어낸 빈이 딱딱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내뱉었다. 산산조각 난 자존심 때문에 자꾸만 얼굴이 일그러졌다. 난생 처음 받아본 박한 대우에 목소리도 떨렸다.

 

 

 

 

 

 

 

 

 

"차은우씨."

 

"아, 뭐요."

 

"연기 잘하시던데."

 

"........."

 

"이번에 촬영하는 드라마 주연자리 맡아 볼 생각 없어요?"

 

 

 

 

 

 

그러나 자존심만을 내세우기에 빈은, 지독한 탐미주의자였다.

 

 

 

 

 

 

 

 

 

*

 

 

 

 

 

 

 

 

 

침대에서 뒤척이던 빈이 가만히 눈을 떴다. 커텐을 전부 쳐 둬 아직은 캄캄한 방 안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빈이 거울 앞으로 향했다. 충혈된 눈이 거울로 향하고, 빈이 손을 들어올려 머리를 정리했다. 옷을 갈아입고는 몸을 내리쳐 탁탁 턴다. 빳빳하게 펴진 옷에 만족스러운 듯 티 안나는 웃음이 퍼졌다. 오늘은 무언가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평소랑은 다른 손님이 오기 때문인지, 다른 날보다 특별하게 여겨졌다. 빈이 가방을 뒤적여 대본 한 뭉치를 꺼냈다.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드라마의 대본이었다. 묵직한 대본 뭉치를 침대 위로 던져놓고 다시 가방을 뒤적여 담배를 물었다. 은색 지포라이터에서 튄 불꽃이 담배와 맞닿고, 곧이어 빈이 한숨을 쉬듯 연기를 뱉어냈다. 슬쩍 눈을 굴려 바라본 대본의 맨 윗장에는 곧은 명조체로 '탐욕' 이라 적혀있었다. 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래층에서 덜컹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왔나보네. 빈의 시선이 방문 앞에 머물렀다.

 

 

 

 

 

 

 

 

 

 

"..왔어요?"

 

"........"

 

"이거 내가 받은 건데, 잘하면 은우씨 주고."

 

"........"

 

"이거 꽤 인지도 있는 작품이에요. 놓치면 후회할걸?"

 

 

 

 

 

 

 

 

 

 

대본을 흔들며 나른하게 중얼거리는 빈의 말에 은우가 몰래 입술 안쪽 살을 씹었다. 잘근, 잘근. 살이 씹히는 소리가 은우의 귓가에만 울렸다. 다 타버린 담배 필터 끝을 물고 침대에 기대어 있던 빈이 침대 위에 놓인 대본을 은우의 발 밑으로 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대본이 은우의 발 앞에 놓였다. 동시에 은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방금 입은 셔츠 단추를 느릿하게 풀어내리는 빈을 보고 당장에라도 방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발 위에 슬쩍 올라와 있는 대본이 눈에 아른거렸다. 실력이 있음에도 은우가 뜨지 못했던 건, 은우를 뒷받침해 줄 배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은우와 빈의 차이인지도 몰랐다. 은우의 윗니와 아랫니가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으득, 으득. 끝 부분만 살짝 씹히던 살이 이젠 조금 더 깊숙한 곳을 씹어댔다. 누가 봐도 고민하는 태가 나는 은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빈이 제 무릎 위에 턱을 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싫은 티가 역력한 표정을 짓던 은우가 곧이어 매고 있던 타이를 억세게 풀어내렸다. 그러고 나서도 가슴이 답답한 듯 한참동안이나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은우가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빈에게 툭 내뱉었다.

 

 

 

 

 

 

 

 

 

 

"하죠."

 

" 으음."

 

"하자고. 섹스."

 

 

 

 

 

 

 

 

 

 

불만 가득한 은우의 얼굴 뒤로 빈의 만족스러운 웃음이 겹쳐졌다. 열기가 오를 시간이었다. 언제나처럼, 다를 것 없이.

 

 

 

 

 

 

 

 

 

 

*

 

 

 

 

 

 

 

 

 

 

침대에 널브러진 빈이 거친 숨을 뱉었다. 옷은 다 풀어헤쳐지고, 머리카락은 땀에 젖은 채였다. 다음 작품 촬영을 위해 며칠 전 물들인 연갈색 머리가 젖어서인지 조금 더 짙은 색을 띄는 것 같았다. 은우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은우 역시도 호흡이 고르지 못했다. 두 사람이 열기를 못 이기고 바르작거린다. 뉴스에서는 점차 겨울이 사라질 거라는 소식만을 전한다. 한국도 예외는 없었다. 열대야에 가까운 날씨에 창문도 전부 다 닫은 방 안은 열이 오르다 못해 답답했다. 빈이 헐떡이며 한숨을 뱉었다. 얼굴 가득 더운 태가 올랐다. 두어 번의 거친 움직임 끝에 두 실루엣이 떨어져 나갔다. 빈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교묘한 웃음을 지으며 제 눈 위에 팔을 올린 빈이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린다. 아주 묘하면서, 소름 끼치는 그런 웃음소리. 은우가 열기 속에서 드는 오한에 몸을 떨자 빈이 눈꼬리를 휘어접어 웃으며 침대 아래 바닥에 놓여있던 대본 뭉치를 집어들었다. 침대에 앉은 은우의 앞에 휙 던지자 나른한 얼굴의 은우가 흠칫하며 받아들었다. 빈이 별 상관 하지 않고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빈이? 무슨 일이니?

 

"그냥요. 회장님. 저번에 받았던 영화 말인데요."

 

- 아아. 그거? 왜, 할 생각 있니? 감독한테 언질 넣어둘까?

 

"아뇨. 그 작품 다른 애한테 넘겨도 돼요?"

 

- ..누구. 또 잤니? 누구야?

 

"...사장님. 이런식으로 나오시면 곤란해요. 자꾸 이런 식으로 하시면 저 그냥 끊을거예요."

 

- ...미, 미안하다. 누구 줄 건데?

 

"차은우요. 신인인데, 연기 봐줄 만 해요."

 

 

 

 

 

 

 

 

 

 

 

느릿한 말투로 주고받는 폼이 아무래도 한 두번 전화한 사이는 아닌 듯 했다.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관계의 의미가 은우의 기분을 더럽게 했다. 통화 내용만 듣자면 스폰을 받는 입장임이 분명한데, 오히려 제 스폰서를 가지고 놀고있다. 은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반라의 상태로 침대에 반 쯤 누운 빈은 누가봐도 예뻤다. 눈이 마주치자 또 싱글 웃어보인다. 은우는 또 입술 끝을 짓뭉갰다. 통화를 끝낸건지 빈이 눈웃음을 치며 은우에게 다가섰다.

 

 

 

 

 

 

 

 

 

 

"이제 그 영화 주연. 은우씨 거예요."

 

"......."

 

"촬영장. 자주 놀러가도 되죠?"

 

 

 

 

 

 

 

 

 

 

 

빈의 물음에 은우가 헛웃음으로 답했다. 오지 말라고 한들, 빈은 올 것이다. 연예계에 대해 미련이 많은 은우와, 잃을 게 없어 미련도 없는 빈은 입장부터가 달랐다. 오늘의 섹스 이후로 두 사람은 스폰 관계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담배를 무는 은우의 입가에 불을 대 준 빈이 은우를 위로하듯 어깨를 뭉근하게 문질렀다. 은우의 표정은 불순한 손길 만큼이나 심란했다.

 

 

 

 

 

 

 

 

 

 

 

*

 

 

 

 

 

 

 

 

 

 

 

 

은우 잘 부탁드립니다. 단정한 수트 차림의 빈이 눈 앞의 감독에게 말했다. 옆에 선 은우도 멀끔하게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촬영진끼리의 첫 미팅 날이었다. 더불어 은우의 촬영 씬에 중간중간 넣을 빈의 배역을 수정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은우의 씬 중간중산에 등장하는 빈은 원래 없던 배역이었지만 빈의 요청으로 넣게 되었다. 감독은 바뀐 스토리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게다가 은우의 비주얼.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뛰어난 외모였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그 감동은 어마어마했다. 우리 영화 주연에, 그것도 야심작으로 내밀고 있는 중요한 포트폴리오가 될 작품에 저런 얼굴의 배우가 출연한다니. 연기력도 나쁘지 않으면서 얼굴 하나는 끝내주는 배우. 감독이 절로 펴지는 어깨를 당당히 내밀며 자랑스러운 티를 냈다.

 

 

 

 

 

 

 

 

 

 

"은우씨. 앞으로 촬영 잘 해보죠. 잘 부탁합니다."

 

"아.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사람이 아주 좋아.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촬영장에서도 이렇게 잘 해줘요."

 

 

 

 

 

 

 

 

 

 

 

서로 잘 부탁한다는 인사와 함께 악수를 하고 나서야 미팅을 끝냈다. 감독이 회의실 밖으로 나가고, 은우의 얼굴이 보란듯이 구겨졌다. 웃고있는 빈의 얼굴이 퍽 맘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제 몫의 대본을 챙겨 가방 안에 집어넣은 빈이 은우를 보고 생글거리며 웃었다. 야실스레 접히는 눈꼬리가 예쁘장했다. 원래 정해져 있던 대본을 작가와 마음대로 상의해 바꾼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마치 제가 보호자인 마냥 미팅 내내 은우를 살뜰히 챙기던 것도 퍽 기분이 나빴다. 말끝마다 따라붙던 우리 은우가, 우리 은우가, 하는 것도 심기에 거슬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감독과 작가 사이를 부드럽게 풀어놓던 그 붙임성 있는 말투도 싫었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잘나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사는거야? 누구도 당신의 진짜 모습을 모르는데, 왜 다들 아는 것 마냥 당신을 좋아해주는거지? 답 없는 의문사가 끝없이 은우의 주위를 공전했다. 빈이 찌푸린 미간 그대로 생각에 잠긴 은우를 불렀다.

 

 

 

 

 

 

 

 

 

 

 

 

"은우씨."

 

"........."

 

"저 감독님 진짜 유명해."

 

"........"

 

"영화만 냈다 하면 천만관객 일궈내시는 분이에요. 알죠?"

 

"........"

 

"고맙지도 않아요? 나랑 한번 굴러서 스타가 될 기회를 얻었는데? 당신만 잘하면 돼. 욕 안 먹게 연기만 잘하면."

 

"..적어도 당신처럼 좆같이 하진 않을거니까 걱정 마."

 

"까칠하긴. 당신 아무리 그 좆같은 자존심 내세워도 결국엔 나한테 빌빌 긴 거나 마찬가지인 거 몰라? 나한테 박아놓고 대본 가져간 주제에 콧대가 너무 높은데요?"

 

 

 

 

 

 

 

 

 

 

 

 

..닥쳐. 매서운 눈을 잔뜩 세우며 은우가 빈을 노려보았다. 빈은 태평한 얼굴로 테이블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 있을 뿐이었다. 와중에도 씨익 웃는 빈의 입술을 너무나도 붉어서, 마치 현혹되는 것과 같은 어질한 기분을 느낀 은우가 눈을 꽉 감고 호흡했다. 악마같은 년. 내 인생에 떨어진, 이.., 거지같은.., 그런데 나를 띄워줄 축복같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머릿속에서 빈은 악마가 되기도 했다가 전지전능한 신이 되기도 했다. 복잡하게 엉켜드는 생각의 파편에 은우가 결국 생각하기를 멈추고 눈을 떴다. 빈이 묘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빈의 입술이 열렸다. 붉은, 붉은, 붉은, 그 어딘가가.

 

 

 

 

 

 

 

 

 

 

"여기 이제 아무도 안 오는데."

 

"......."

 

"연습 좀 하다 갈까요?"

 

"......."

 

"물론, 나는 은우씨 위에 올라탈 거지만 말이에요."

 

 

 

 

 

 

 

 

 

 

은우가 입술을 짓씹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이 풀린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빈이 눈웃음쳤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두 사람의 형체가 거칠게 얽혀들었다.

 

 

 

 

 

 

 

 

 

 

*

 

 

 

 

 

 

 

 

 

 

"은우씨! 그게 아니잖아. 빈이랑 눈을 마주치고 감정 연기를 해야지!"

 

"..죄송합니다."

 

"잠깐 쉬었다가 하자. 다들 휴식!"

 

 

 

 

 

 

 

 

 

짜증스러운 감독의 목소리가 촬영장 안을 메웠다. 몇 분이면 끝나야 하는 장면 촬영이 몇십 분 째 딜레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촬영장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당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은우 대신 빈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빈에게 떨어지는 시선은 따스함, 아니면 안타까움이었다. 상대배우 잘못 만나서 저게 뭐래요. 우리 빈씨 오늘 고생하네. 그러게 연기도 못하는 신인을 왜 가져다 쓴대요? 뭣 모르고 뱉어내는 스태프들의 말들이 은우의 마음을 잔뜩 휘저었다. 입술 끝을 꽉 악문 은우가 제 몫으로 배정된 의자에 몸을 앉혔다. 이것도 빈의 팬이 마련해 준 것이다. 빈의 촬영 소식이 퍼지자마자 빈의 팬들이 힘을 모아 빈과 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했다. 더운 날 시원하라고 의자에 붙여 준 작은 선풍기부터, 아이스 아메리카노, 밥차, 각종 음료수까지. 다 제 것이었지만 제 것은 없었다.

전부 다 빈이 밑밥을 깔아둔 덕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첫 작품을 찍는데, 이번이 첫 작품이라 아직 아는 사람이 없어요. 연기도 잘해서 주연 자리를 맡았는데, 많이 힘들텐데. 서포트 해주실 분이 안 계세요. 우리 팬 여러분이 함께 해주시면 안될까요? 공식 SNS 계정으로 전했던 소식이 빈의 팬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제게도 이런 호화가 주어졌다. 빈과 꾸준히 만남을 이어온 덕에 빈도 이런 언질을 해준 것이었다.

무명이라는 건 진짜 좆같구나. 은우가 뼈저린 깨달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한순간 느껴지는 인기척에 번쩍 눈을 뜨자 제 앞에 서서 허리를 숙여 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빈이 눈에 담겼다.

 

 

 

 

 

 

 

 

 

 

 

"왜 이러실까요. 차배우님."

 

"........"

 

"당신 실력 원래 이렇게 좆같아? 내가 사람 잘못 본 건가? 나처럼 좆같이는 안 한다며."

 

"........."

 

" 아니면."

 

"........."

 

"상대가 나라서 그래요? 어제 그 핫한 섹스가 생각나시나?"

 

 

 

 

 

 

 

 

 

 

 

잔뜩 비꼬는 태가 화가 단단히 난 듯 했다. 아닌 척 해도 빈은 아주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제가 추천해준 배우가 이토록 욕을 얻어먹고 있으니 자존심이 상하는 건 당연했다. 은우도 알고있는 사실이기에 일부러 더 입을 다물었다. 단 다섯 마디만 뱉으면 되는 씬이었다. 네가 뭘 알아, 난 너 때문에 다 뺏겼어, 너 때문에 망쳤어,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별 거 없는 몇 마디에 은우는 뼈저린 끔찍함을 겪었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밤새 연습했던 장면이었고, 감정이 격양되는 만큼 영화의 정점에 오르는 장면이었다. 집에서 홀로 소리를 치며 감정 연기를 할 때는 마치 제가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이 감정을 이입했다. 온 집안을 엎어버리고 싶을만큼 화가 나 한참을 다스려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빈의 눈을 마주하자 놀라울 정도로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은우가 몸싸움 장면으로 헝크러지게 연출한 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 와중에도 앞에 선 빈은 비킬 생각이 없는지 빤히 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우씨 왜 그러는지 알겠네요."

 

".........."

 

"감정이입 하셨나봐요."

 

".........."

 

"왜? 당신이 이렇게 된 게 나 때문 같아서? 내가 모든 걸 망쳤나요?"

 

".........."

 

"네가 씨발, 이 따위로 나오면 안되지."

 

".........."

 

"내가 해준 게 몇갠데. 다 받아먹고. 이제 와서 깨끗한 척이야. 박혀도 내가 박혔지. 네가 박아놓고 이제 와서 수치스러워?"

 

 

 

 

 

 

 

 

 

입술 끝을 깨물고 은우를 바라보는 빈의 눈에 핏발이 섰다. 뭉그러진 자존심은 어느 새 눈물이 되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동자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뚝뚝 흘렀다. 은우가 당황하며 빈의 눈을 마주했다. 그게 아닌데.. 그 와중에도 욕설을 내뱉는 빈의 입술은 너무나도 붉어서, 계속해서 시선을 빼앗겼다. 마치 홀린 듯이. 어질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은우가 다시 빈을 마주했다. 역시나 붉은 그 어딘가가 자꾸 신경쓰였다.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하던 은우가 결국 입을 열었다.

 

 

 

 

 

 

 

 

 

 

 

"문 빈씨."

 

".........."

 

"빈씨."

 

"..왜요."

 

"..키스 해 줄래요."

 

 

 

 

 

 

 

 

 

 

 

가히 충동적인 발언이었다. 빈이 잠시 놀란 빛을 내보이다가 예의 그 야실스런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자존심 상해하던 얼굴은 어디가고, 교활한 고양이 한 마리만이 눈 앞에 남았다. 효과가 먹혀들기 시작했다.

 

 

 

그래. 누가 나를 싫어해.

 

그래. 누가 너를 싫어해.

 

 

너는..너무, 예뻐서... 씨발, 그래서.. 죽여버리고 싶어.

 

 

나한테 키스 해 줘. 이 악마같은. . . , . .

 

 

 

 

 

 

 

 

 

 

*

 

 

 

 

 

 

 

 

 

 

 

화장실의 작은 칸막이 안. 질펀한 소리가 새어나와 화장실을 가득 메웠다. 격한 소리의 주범인 은우와 빈은 각자 제 앞의 것을 붙들고 거친 숨을 뱉어낼 뿐이었다. 빈은 벽을 짚고, 은우는 벽을 짚은 빈의 허리를 붙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달뜬 숨을 뱉으며 헐떡이던 빈이 낮게 쳐올리는 은우의 허릿짓에 고개를 젖혔다. 볼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하며, 잔뜩 상기된 얼굴이 두 사람의 흥분도를 나타냈다. 몇 번의 격한 움직임 끝에 두 사람이 잠시 자세 그대로 멈췄다. 곧이어 떨어져나온 실루엣이 서로를 마주했다.

은우는 촬영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빈과의 키스 한 번에 감정을 얻었고, 빈과의 키스 한 번에 침착함을 얻었다. 밤새 연습한 것과 같이 연기를 마치고 나서야 욕을 먹던 은우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왜 안 했어요! 은우의 연기에 매우 만족한 감독도 한달음에 달려나가 은우를 끌어안을 정도였다.

 

 

 

 

 

 

 

 

 

 

 

 

"하아.., 날이 갈수록 잘하면 어떻게 해요?"

 

"........"

 

"뭐, 나야 좋지만."

 

"...빈씨. 섹스하지 마요."

 

"으응,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스폰서, 관둬요."

 

"내 밥줄인데 왜요. 그거 관두면 나 어떻게 살라고? 은우씨가 책임이라도 질 텐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 짓부터 관둬요."

 

"걱정 마요."

 

".........."

 

"은우씨가 이렇게 예쁜 한 나는 은우씨랑 섹스할거고, 뭐.."

 

".........."

 

"운 좋으면 사랑도 하겠네요."

 

 

 

 

 

 

 

 

 

 

 

 

나는 이미..,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은데. 뱉지 못한 말이 은우의 목구멍 끝자락에서 삼켜졌다. 더 뱉었다간 빈이 떠나버릴 것 같은 교묘한 불안감 속에서였다. 빈의 눈웃음에 은우는 더이상 냉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딱딱하고 심기에 거슬리는 무표정을 짓곤 하던 은우는 다정한 눈길로 빈을 보았다. 비록 웃지는 않더라도 이전과는 달리 확연히 풀린 얼굴이었다. 빈이 은우의 품 안에 안겼다. 함께 끌어안아주진 않아도 빈의 등에 올라간 오른손이 어색하게나마 빈의 등을 두드렸다. 빈이 은우의 품 속에서 웃었다. 은우는 보지 못하는 미소. 양껏 입꼬리를 당겨 웃는 웃음. 교활한, 또는 악마같은.

 

 

 

 

 

 

 

"이러니까 좋네요, 참."

 

 

 

 

 

 

 

빈이 낼름 귓가에 속삭였다.

 

말했지 않은가. 빈은 지독한 탐미주의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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