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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차디찬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잠든 듯 멈춰있던 소년이 더운 한숨을 가만히 내뱉었다. 뽀얗게 서린 김을 둥근 손끝으로 문지르자 바깥 풍경이 투명하게 드러나 소년의 시야를 채웠다. 멀리서 소년과 비슷한 인영들이 즐거운 걸음걸이로 가까워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정다운 다툼을 하다, 이내 언제나와 같은 속도로 멀어졌다. 창문 안의 소년은 다시 하얀 숨으로 그 모습을 가리고 입김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가리기를 반복했다.

 

보고 싶지 않기도, 못 견디게 보고 싶기도 해서.

 

주먹 하나가 겨우 드나들 만큼만 열리는 창으로 볕과 소리와 바람은 오갔지만 소년의 외로움과 그리움, 수많은 질문과 바람들은 아무 곳에도 가닿지 못하고 맴돌다 그 자리에 맺혀있었다. 그렇게 소년은 꼬박 열다섯 해를 그 창 안에서 빛과 어둠을, 비와 노래를, 모든 계절과 색깔을, 그리고 사랑을 배웠다.

 

 

 

구해줘

w.다로

 

 

 

그 아이의 시원한 입매에 눈이 갔었다. 무표정일 땐 삐쭉하던 윗입술이, 올라가는 입꼬리에 끌려 부드럽게 퍼지고, 입술 양옆으론 쉼표 같은 자욱이 패이며 가지런한 앞니가 톡 드러날 땐 늦여름 소낙비가 갠 뒤에 부는 맑은 바람의 느낌이 났다.

 

소년은 그 아이가 가까이 지나가는 때를 기다렸다 숨겨두었던 곡물 한 줌을 창틈으로 내밀어 작은 새에게 주었다. 기분이 좋은지 고운 포로롱 소리를 내면, 그 소리를 좋아하는 듯 한 그 아이는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다 곧 새를 발견하곤 친구들에게 열심히 이곳을 가리키기 바빴다. 모두가 이쪽을 쳐다본다 해도 그들 눈에 비치는 건 반사된 건물과 나무뿐이었으니, 어머니가 아닌 누군가와 눈을 맞추는 건 언제나 소년의 꿈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다.

 

 

 

 

-

 

소년을 가둔 것은 소년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였다.

 

 

그는 두려웠다. 제 배에서 피부가 창백하고 눈이 파란 아기가 태어났다. 아비는 제 새끼가 아니라며 집을 떠났고 마을 사람들은 덩그러니 남겨진 두 사람을 손가락질 했다. 어미가 인간이 아닌 것과 정을 통했다느니, 흡혈귀의 저주를 받은 녀석이라느니, 그 파란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친 사람은 돌이 된다느니..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말들은 칼날 같았다.

캄캄한 비가 내리던 날, 한 팔엔 아기를 한 팔엔 가방 하나를 들고 무작정 떠났다. 밤이면 아기를 품에 꼭 안고 아무 것도 모르는 투명한 눈을 바라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네 눈은 은하수가 내린 푸른 비야, 은우야.

지켜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약한 피부로 태어난 탓에 햇빛을 받으면 살결이 금세 붉어지고 부어오르는 은우를 꽁꽁 싸매 포대기에 메고 시장 바닥에 앉아 장사를 했다. 답답한 은우가 손으로 숨구멍을 걷어내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파란 눈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 몇 시간이고 걸어 시장을 옮겨 다니며 악착같이 일했다. 은우가 혼자 있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문을 걸어 잠가 가둬놓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했다.

그렇게 작은 집을 얻었다. 큰돈을 써서 햇빛이 피부를 괴롭히지 않는, 밖에선 안이 보이지 않는 창문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커다랗게 달았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은우를 위한 최선이었다.

 

어리고 여렸던 그는 강박과 집착이 점점 자신을 잠식해가는 줄도 모르고 잘못된 사랑을 은우에게 쏟아 부었다. 감추고 억누르고 가둬두니 타인이 아이를 상처 입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언제까지나 아이인 것은 아니었다.

 

시간은 잊은 것이 없는 듯 흘러갔고, 아이는 잃은 것이 없는 듯 자라났다.

 

 

 

 

-

 

오늘도 꿈에 그 아이가 나왔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다. 그저 나와,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진갈색 눈동자와, 나의...

 

고개를 저어버리곤 시계를 보자 그 아이가 등교할 시간임에 습관처럼 창문을 앞으로 밀어 열었다. 한껏 연다 해도 겨우 한 뼘쯤 밀려 어차피 닫은 채로 보는 것과 똑같지만 이따금 운이 좋으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나 장난스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교복을 입은 그 아이가 기분이 다 드러나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가까워졌다. 이마에 내려앉은 가지런한 머리카락이 조금 짧아진 것 같아 자세히 보려 창틈으로 고개를 숙였는데, 거짓말처럼 위를 올려다 본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

 

당황해 굳은 나를 보곤 그 아이의 눈과 입이 조금씩 커졌다. 한참인지 잠깐인지 알 수 없는 생경한 시간의 흐름이었다. 소리 지르며 혼비백산 하거나, 적어도 뒷걸음질 치며 못 본 척 달아날 거라 생각했다.

 

"아.. 안녕."

 

눈만 깜빡이며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 아이는 머쓱한 듯 어색하게 웃고 가던 길로 걸음을 재촉한다. 안녕..이라니? 짧은 평생 동안 눈은 물론 살갗조차 모두 가리고 존재를 지워내는 매일만을 살아온 나에게 누군가가 건넨 첫마디였다. 처음 만난 상황에서 보편적으로 나누는 인사말이겠지만, 보편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나에겐 무엇보다도 특별한 한 마디가 아닐 수 없었다.

 

 

습관처럼 손톱을 깨물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네가 아닌 내가 나오는 꿈을 꿨다. 어디로부터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무엇으로부터 도망인지도 흐릿하기만 한. 과거의 기억인지 미래의 두려움인지, 그 경계인지 모를, 몸이 떨리도록 깜깜한 꿈을.

 

땀에 젖어 눈을 뜨니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어쩌면 내가 가장 많이 상상하고 바라왔던, 언젠가 그런 날이 와줄까 몰래 기대해 보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것만 같던 순간인데도 나는 어째서 달아나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는지. 나의 창에 오늘은 원망이 하얗게 서린다.

 

 

 

 

-

 

"엄마. 나 아침에 학교 가다가 눈이 파란 애를 봤다?"

"응? 어디서?"

"그 있잖아, 광장 지나서 거울로 된 창문이 있는 집."

"...그 집에 애가 있다구?"

"나랑 비슷할 것 같던데. 창틈으로 얼굴 반쪽밖에 못 봤지만.. 내가 인사했는데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

 

그 집이라면 워낙 큰 창이 특이해서 눈에 띄는 집이었다. 상담소에서 일을 하는 빈의 엄마는 찾아온 사람들과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이라서 동네 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는데, 그 집 아줌마는 혼자 살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고 그 신기한 창에 대해 물어보면 표정을 굳히며 절대 대답을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 아이에게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아, 내일도 만나면 또 인사해. 대답 없으면 그냥 가고. 아, 눈에 대해서는 먼저 말하진 말고.”

 

 

 

빈은 매일 등굣길에 은우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며 한마디씩 말을 걸었다. 안녕, 난 학교 가는 길이야. 내 이름은 빈이야, 문빈. 난 열여섯 살이야. 오늘 날씨 정말 좋다, 그치? 내일은 비가 올지도 모른대. 다음 주면 벌써 시험이야. 오늘은 늦잠 자서 좀 늦었어, 달려가야겠다.

 

엄마가 한 말도 있었지만, 빈 스스로도 그 아이의 이름은 뭔지, 왜 학교에 가지 않는지, 대답은 해주지 않으면서도 항상 창가에서 저를 기다리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안녕.”

“..안녕, 빈아.”

 

몇 주가 지나고, 드디어 처음으로 말을 나누게 된 날. 

 

“헛? 와, 대답해 줬다! 한 번 더 해주면 안 돼? 빈아- 이거.”

“... 빈아.”

 

빈이 은우가 사랑해 마지않는 미소를 정면으로 짓자 은우도 덩달아 살풋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은 은우에게도 빈에게도 새로운 것들 사이에서 영원할 기억이었다.

 

 

그렇게 등하굣길마다 짧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은우 마음속에 있는 정체를 모르던 감정들은 걷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커지고 뜨거워졌다. 하루 종일 아무런 의욕도 없이 엄마가 가져다놓은 책을 읽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운동을 하고 준비된 밥을 먹고 혼자서 공부를 했다. 하지만 빈을 만난 후론 내일은 무슨 말을 나눌지 고민하고 빈이 어떤 하루를 보낼지 궁금해 하고 나도 너와 함께할 순 없을까, 난 뭘 잘못해서 방 한 칸에서 나가지 못하고 수족관 속 물고기처럼 살고 있는 걸까, 두서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강렬한 욕구가 은우의 온 몸을 삼켰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빈과 함께하고 싶다.

 

 

어머니가 중요한 물건을 어디에 보관하는지 쯤은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엄마 물건에 손을 댔다. 빈아, 부탁이 있어.

 

“나 좀 구해줘.”

 

열쇠 세 개를 창틈으로 떨어뜨렸다. 

 

 

 

 

-

 

우리는 달렸다.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땅을 밀어내며 앞으로 달려가는 기분이 너무도 낯설어 자꾸만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 같아 내 발에 날개가 생겼나 내려다보기도 했다. 하염없이 도망치던 꿈이 떠올랐다. 눈을 비비고 나니 나는 달아나는 꿈이 아니라 나아가는 현실에 있었다.

 

허억, 허억, 헉, 헉...

 

숨은 금세 턱 끝까지 차올랐고 심장은 살갗을 뚫고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은우야! 앞에 봐 봐."

 

조금 어지러운 기분에 감고 있었던 눈을 뜨고 빈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자, 내려다보이는 마을에 따뜻한 노을빛이 지천에 물들어 있었다. 모든 시간이 멈추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쁘지? 너랑 꼭 같이 오고 싶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거든. 이 계절, 이 시간에, 이곳."

 

물론 그 아름다움 속엔 항상 네가 있을 것이다.

 

 

“빈아, 넌 나한테 모든 걸 다 말해주면서 왜 물어보지는 않아?”

“네가 말해주길 기다리는 거야. 질문도 때로는 상처가 될 수 있다고 배웠거든.”

 

"넌.. 나 처음 봤을 때.. 안.. 놀랐어?"

"많이 놀랐지."

"..."

 

그때를 떠올리듯 먼곳을 응시하던 빈이 고개를 돌리고 동그란 눈을 데구르 굴려 푸른 두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네 눈에 호수가 빠진 줄 알고."

 

먼저 깍지를 껴오는 조금 작은 손을 빈틈없이 맞잡고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하듯 생각했다.

 

 

있잖아, 빈아.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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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은콩 2018 겨울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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