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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 나라의 체셔 고양이

※ 거칠고 나쁜 표현과 묘사들이 많습니다. 감안하고 봐주세요! 감사합니다. ※

 

 

 

 

 

 

기(起); 지루한 엘리스

빈은 어렸을 적 어울렸던 질 나쁜 친구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야, 약 빨고 섹스해 봤냐? 존나 홍 간다.

 

질겅질겅 씹고 있는 담배가 마치 대마초라도 되는 마냥 어깨엔 잔뜩 허세가 들어가 있었다.

 

그니까 이게 약을 하면 온종일 한 가지만 해도 기분이 존나 째진대. 하늘에 꽂히면 걍 종일 누워서 천장만 쳐다봐도 존나 좋은 거야. 근데 야, 생각을 해봐라. 약만 해도 기분이 좋은데 거기다가 섹스까지 해. 뒤지지 않겠냐?

 

꼭 무슨 자기가 해본 것처럼 설명이 디테일한 그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본 빈이었다. 왜냐면 그가 빈의 첫사랑이었으니까.

왜 하필이면 그때가 생각나는지. 발끝부터 허벅지 안쪽을 지나 음낭까지 덜덜 떨리는 게 아무래도 약 때문인 것 같았다. 뿌연 연기가 몽글몽글 무지갯빛으로 보이는 것도…… 아아 씨발 기분 존나 좋네…… 아니 드러운 건가. 팔랑거리는 발등이 보였다. 억지로 콧속으로 집어넣은 가루는 무언지 빈은 모른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목에서 시작해 정수리까지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목이 붙잡혀 침대로 던져진 빈은 입고 있던 옷이 박박 찢겨 나가는 걸 느꼈다.

 

지독히도 기분 좋고, 좆같은 섹스의 시작이었다.

 

사람 나이에서 12살이면 인간 자아의 형성이 완성되는 시기였다. 그 시기에 문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술만 마시는 아버지와, 악착같은 어머니의 밑에서 살고 있었다. 10평짜리 단칸방에서 가족 모두가 잠을 잤고, 밥을 먹었다. 눈이 텅 비어있는 부모를 보는 느낌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느끼게 된 시기도 꽤 되었다고 12살의 문빈은 생각했다.

 

2009년은 문빈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였다. 그는 고등학교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실 뒷자리에서 잠만 퍼질러 자는 학생이었다.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복장이 불량한 학생도 아니었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한 학생에 속해 있었다. 물론 선생님들의 입장에서는. 같은 동급생들에겐 문빈은 걸레로 유명했다. 대달라고 하면 대주는 애로. 물론 다 구라였다. 하지만 빈은 그렇다 할 해명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짜장면집 배달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20살 문빈이 부모의 사채에 팔려간 것이. 아직도 이런 게 있긴 하네? 솔직히 아무런 거부감도 없었다. 그냥 받아들였다. 그는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했다. 웃기게도 학교에서 못해본 짱을 여기서 해봤다. 보스의 깔인가 깔때긴가. 존나 웃기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빈이 보아도 다 늙어빠진 인간의 깔때기가 되어도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아직도 그의 똥꼬를 열심히 빨아대는 짐승들 덕분에 빈의 위치는 어느 누가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긴 했다. 처음은 재미있었다. 자신을 보면 수그러드는 고개들, 존칭을 쓰는 말투. 꼴에 깡패들이라도 격식은 따지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삶이 무료하고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진짜 콱 죽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그는 마음대로 죽지도 못했다. 자신의 목숨에 부모의 목숨도 달려 있다. 짜증 날 정도로 감흥 없고 지루한 삶에서 유일하게 빛났던 시절이 있어서 그렇게 텅 빈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어도 함부로 놓질 못하는 빈이었다. 아무튼, 빈은 너무 심심했다. 첫사랑 말마따나, 약 빨고 섹스를 해도 그 순간뿐이지 그저 그랬다. 점점 약을 하기 싫어졌다. 그리고 하고 싶었다. 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었다. 침대에서 몇 날 며칠을 가만히 누워 있던 적도 있었다. 하루는 서재에서 밤을 새웠다. 그리고 또 하루는 조직에서 운영하는 클럽에서 밤을 새웠다. 아무리 잠을 자고, 책을 읽어도, 춤을 춰도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보스를 죽여. 그럼 너는 자유야.

 

자유고 뭐고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알겠다고 했다. 그날의 일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사실 뭐가 뭔지 알지 못했지만, 빈은 그의 배에 칼을 쑤셔 넣을 때 약보다 더한 쾌감을 느꼈다. 곁에 있던 조직원 하나가 그랬다. 흰자밖에 안 보이더라고.

 

 

 

 

 

 

승(承);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따지고 보면 남자친구 아니었나? 애인인가? 모르겠다. 빈은 재미있었다, 그가 죽어가는 모습이. 여러 번 쑤셨던 것 같다. 기억도 안 난다. 칼이 한 번 꽂힐 때마다 억, 하고 소리를 냈다. 그리고 빈은 그가 자신을 무자비하게 대하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그를 싫어했던가, 안타까워했던가? 그를 동정하기 싫었다. 그날 이후로 쿠데타에 성공한 빈을 떠받드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허수아비 보스가 된 날 또한, 그날 이후다.

허수아비라고 해도 서류의 사인이며, 구역 정리며 빈이 해야 할 것은 많았다. 그는 또 이 생활에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마다 뾰족한 칼끝이 살을 뚫고 들어가는 그 느낌이, 칼의 손잡이를 타고 자신의 손등을 타고 흐르던 피의 느낌이 더 선명해졌고 그리워졌다.

그렇게 지루한 일상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을 때 빈이 딱 26살이 되던 해에 인생에 다시없을 기회가 찾아왔다.

조직이 운영하는 것들이 많았다. 사채나 건물 관리도 있었지만, 룸살롱, 스트립쇼 클럽, 나이트…… 거의 유흥업소들이 수도 없었다. 그만큼 돈이 잘 되는 것들이 없기 때문이었다. 빈은 그다지 그런 것에 흥미가 없었다. 조직 아래 있기 때문에 관리 차 한 번씩 둘러보는 것이 다였기 때문에 영업하기 전에나 마감하고 나서 혹은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마다 들렀다. 그날도 똑같았다. 어디 뭐 국회의원이던가, 조직이 뒤를 봐주던 사람이었고 또 그는 조직에 많은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 빈이 그를 보러 가지 않을 수가 없던 날이었다. 물론 실세가 하나 따라붙었던 것은 당연하였고.

 

 

 

“그 영감탱이도 취향 참 이상하지. 게이 스트립쇼 하는 날만 꼭 골라서 오더라니까.”

“……원래 배 나오고 대머리 인간들이 다 그런 취향인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는 빈의 말에 깔깔대고 웃었다. 빈은 자신이 죽인 남자가 떠올랐다. 남산만큼 부푼 배에서 퐁퐁 피가 솟구쳐 나오던 남자. 쇼가 한창인 무대를 지날 때쯤이었다. 다른 쇼맨들보다 더 탄탄한 몸을 가진, 새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를 가진 그가 깔끔한 구두 하나만을 신고 무대에 올라와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빈의 눈이 반짝였다, 칼날이 반짝이듯이.

 

 

 

“쟤, 지금 당장 내 사무실로 갖다 놔.”

“지금 당장?”

“어, 지금 당장.”

 

 

 

 

 

 

전(轉); 여왕과 재판

“들었어요, 당신 이야기.”

“뭘?”

“그냥, 이거저거.”

 

 

 

존나 잘생겼네. 고등학교 때 첫사랑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잘생겼다. 심지어 그의 얼굴 옆에 저 얼굴을 갖다 대 보니 구토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내가 그때 걔 뭐가 좋다고 따라다녔더라? 그 이유조차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는 아까완 달리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까 그 깔끔하고 새하얀 배에 자신이 만든 칼자국을 내고 싶었다. 복부 쪽만 노려보듯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왜요? 하고 묻는다.

 

 

 

“너 칼 맞아 봤어?”

“미쳤어요?”

“그럴지도 몰라.”

“맞아본 적도 없고, 맞기도 싫은데요.”

“아까 너 배를 보니까 칼자국 내고 싶었어.”

 

 

 

그가 빈을 미친놈 쳐다보듯 했다. 빈은 그 눈이 싫지 않았고, 머지않아 그런 그의 배에 칼자국을 내게 되었다.

 

빈이 그를 데리고 오던 날부터 빈의 옆엔 꼭 그가 붙어있었다. 처음에 그는 빈에게 스트립쇼 클럽에서 쓰던 가명을 일러주었다. ‘차은우예요.’ 하는 목소리엔 진심이 가득 담기어 있었는데 얼굴은 거짓이 가득했다. 하지만 빈은 꽤 무신경한 사람이었다.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가 웃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이동민이 진짜 이름이에요.’ 그걸 들은 빈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건 나만 알고 있을게.”

 

 

 

동민은 그런 빈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날 둘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주로 이야기하는 건 동민이었고, 빈은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동민은 사실 엄청 부잣집 도련님이었다고 했다. 부도로 아버지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한 번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이런 데뿐이어서,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했다. 빈은 그냥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나도 그랬어. 억지로 약을 먹고 섹스를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그런 상황. 그렇구나, 무신경한 말투가 섹시한 입술에서 나오는데 동민은 무언가 참을 수 없어지는 그런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 둘은 섹스를 했다.

 

빈은 사실 의외로 매력이 흘러넘치는 사람이었다. 본인은 잘 모르는 듯했지만. 평소엔 그렇게 무뚝뚝한 인간이 침대에서 그렇게 야하고 귀여워지는 게 웃겨서 참을 수 없었다. 아마 조직 사람들은 모르겠지? 나만 알고 있겠지. 하지만 반년 정도를 빈의 옆에 붙어 있다 보니 어쩌면 그를 탐내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점점 욕심이 났다. 안 돼, 이 사람은. 내 거야.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동민은 당연하듯 빈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빈이 마련해준 집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걸 서운해 하지도 않는 빈이 조금 서운했지만, 빈의 집으로 매번 찾아와도 아무 내색도 없이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그가 또 좋았다. 항상 그들은 함께 저녁을 먹었고, 와인을 한 잔 씩 마시고 침실로 들어갔다. 한 번의 섹스 후, 전희를 잠깐 느끼고 있던 빈에게 얘기했다.

 

 

 

“아직도 내 배에 칼자국 내고 싶어요?”

“뭐?”

“그냥,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서요.”

 

 

빈은 아무런 말도 없이 동민의 배를 검지로 쿡 한 번 찔러보며 대답했다.

 

 

 

“응, 내고 싶다.”

“……그럼 그렇게 해요.”

“너 지금 죽고 싶다는 말이야?”

“뭔 소리야. 그냥 딱 안 죽을 정도로만 내달라는 거지, 흉터만 남게.”

“엄청 아플 것 같은데.”

“칼 맞아 본 적 없어요?”

“없어.”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하고 빈이 그런다.

 

 

 

“그럼 나도 내줘, 내 배에. 네가.”

“……그건 싫어요.”

 

 

 

동민은 빈의 아랫배에 입을 맞추었고, 다시 섹스가 시작되었다. 동민은 몇 번이나 빈에게 물었다. 나를 사랑해요?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제발요. 빈은 쾌감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며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미안해.

 

요즘 들어 이상하게 빈이 조용했다. 늘 조용하긴 했지만 그것이 눈에 띄게 더 해졌다. 그리고 동민은 그런 빈의 눈치를 봤다. 항상 대범하기 짝이 없던 동민의 행동들은 점점 소극적으로 변하고 빈의 의견을 계속해서 물었다. 조직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졌다. 허수아비라도 보스는 보스라고, 조직원들이 빈의 태도에 행동을 조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짜 돌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그라서 진짜 실세라는 진우조차도 그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일 때가 많았다. 정작 문빈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마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기분에 맞추어 행동한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동민은 슬슬 무서워졌다. 빈이 자신에게 질려버린 건 아닐까 싶어서. 저 사람이 도대체 뭐라고. 그래서 그날 밤 동민은 작고 예쁜 단도를 직접 가지고 빈의 방으로 들어갔다.

 

 

 

“찔러줘요.”

“야.”

“내 배에 칼자국 내고 싶다며.”

“너 왜 그래, 갑자기.”

 

 

 

빈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빈에게로 다가와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는 동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동자가 덜덜 떨리는 것이 뭐가 그리도 불안한지. 아마 그때 동민의 물음에 대한 대답 때문이겠지.

 

 

 

“그거 알아요?”

“뭘?”

“빈 씨는 되게 위태로운 사람 같아요.”

“…….”

“처음에 당신을 봤을 때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나까지 그렇게 될까 봐 상종하기 싫었거든요? 근데 뭐, 어떻게 해요. 당신이 갑이고 난 을인걸.”

 

 

 

동민은 목소리도 떨고 있었다. 울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빈은 동민의 머리칼을 조금씩 잡고서 살짝 잡아당기니 그가 힘없이 그냥 웃기만 했다.

 

 

 

“근데 지금도 나는 을이고, 당신이 갑이에요.”

“무슨 말이 그래? 갑이 어디 있고 을이 어디 있어.”

“당신의 한 마디와 표정에 항상 쩔쩔 매요. 내 말에 당신이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아니면 어떻게 해야 당신이 웃을까? 나한테만 웃어줄 수는 없을까? 나만 바라봐줬으면 하는데.”

“…….”

“당신은 어때요?”

“이동민.”

“나를 왜 데리고 왔나요.”

“…….”

“저는 이제 그만할게요. 당신이 나를 찾아와요.”

 

 

빈의 발끝에 단도를 가지런히 놓은 동민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를 나갔다. 손잡이 부분을 발바닥 끝으로 밟았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살가죽을 뚫고 들어온다. 그때, 그런 대답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빈은 동민을 볼 때마다 이 곳을 들어오기 이 전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모습이 자꾸 꿈에 나왔다. 쟤는 열심히 사는 애고, 나는 하등 보잘 것도 없는 앤데 내가 계속 잡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냥 재밌는 것에만 반응하는 엘리스 같은 어린 애일 뿐인데.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빈은 칼을 집어 들어 재킷 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걸 조심히 감쌌다. 빈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차은우 죽이지도 말고, 털 끝 하나도 대지 말고 그대로 그냥 내보내 줘.”

‘뭔 소리야?’

“알 거 없어. 그리고 지금 와, 서재로.”

‘문빈.’

“씨발, 빨리 그냥 오라고!”

 

 

전화가 채 끊기기도 전에 휴대폰을 벽으로 던진 빈은 인생에 살면서 처음으로 고함을 질러 보았다. 서재에 있는 책을 있는 대로 아무 데나 던지고 소리 치고 또 소리 내어 울어 보았다. 진짜 이동민, 너는 참 나한테 처음을 많이 선물해주는구나. 서재 한 가운데 무릎을 끓어 안고 얼굴을 묻은 빈은 진우가 서재로 오기 전까지 한참을 울기만 했다.

 

 

 

 

 

결(結); 다시 집으로

“마음대로 못하는 거 잘 알잖아.”

“네가 죽이라는 대로 죽여줬잖아, 보스. 하라는 대로,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해줬잖아.”

“빈아.”

“짜증나게 하지 마, 진짜.”

“야, 문빈.”

“내가 내 마음대로 진짜 못하는 줄 알아서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니?”

 

 

 

진우는 갑자기 일어난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가겠다고? 여기서? 위험한 거 뻔히 알면서 어떻게 나가려고 해. 빈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였다. 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처음 진우가 빈을 보았을 때처럼.

 

 

 

“지금이라면 너무 일러. 아직 전 보스 사람들이 이 갈고 있는 거 몰라?”

“몰라.”

“제발, 빈아…….”

 

 

 

마치 어린 아이 같았다.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주라며 떼쓰는 어린 아이. 이유라도 들어보자고 그를 붙잡고 있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차은우는 왜 또 그냥 내보내는 건데? 당장 데리고 오라고 할 땐 언제고. 빈은 그의 이름이 들리자마자 흠칫 어깨가 떨렸다. 진우는 이런 빈의 모습을 처음 겪는 것이라 황당하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했고 빈이 조직을 살아나갈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보스를 죽인 남첩. 전 보스를 받들던 조직원들은 그를 어떻게 조질지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이 안 봐도 뻔한데.

 

 

 

“그러다가 죽으면 그냥 죽는 거야.”

“너 말 함부로 하지 마.”

“사람 죽이라고 하던 놈이 잘도 씨부리네. 헛소리 그만하고 꺼져, 난 할 말 끝났어.”

“뭐 어쩌게.”

“네가 자유라며. 그렇게 된다고 했잖아.”

“너 자유고 뭐고 상관없던 거 아니었어?”

“……지금은 상관있어.”

 

 

 

진우는 알았다. 이 모든 일은, 은우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동민은 빈의 곁을 떠나고 나서 하루도 온전히 살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맞긴 한 건지 괜찮아도 너무 괜찮아서 자기 자신에게 조금 섭섭할 지경이었다. 당신이 나를 찾아오라고 했지만 빈은 찾아오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건가. 뭐.

조직을 나오고 나서 멀리 떨어진 외진 동네에 원룸 하나를 구했다. 전에 빈이 주었던 오피스텔은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것 같았지만 그 곳엔 찾아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 가, 쫀심이 있지. 원룸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가게 앞의 간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빈과 처음 만났을 땐 푹푹 찌던 여름날이었는데 지금은 숨만 쉬면 입김이 나오는 계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계절이 돌아가는 것처럼 나도 그때로 마음대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이나 하고 앉아 있는 것 보면 또 괜찮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동민은 사실 시도 때도 없이 빈의 생각을 했다. 외로운 새벽엔 존나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빈을 반찬으로 자위도 몇 번, 아니 자주 했다. 동민은 언제부터 자신이 그렇게 빈에게 빠져들어 갔는지 가늠이 가지도 않았다. 처음의 싫었던 일주일, 호기심의 한 달.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그냥 이동민은 없었다.

 

 

 

“존나 춥다.”

“문빈도 보고 싶고.”

 

 

 

코를 한 번 훌쩍인 동민은 마지막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 앞에 자신이 마셨던 똑같은 맥주가 놓여졌다.

 

 

 

“넌 춥다면서 여기서 뭐해?”

“……빈이 씨.”

“빈이 씨 그거 좀 그만해. 사실 들을 때마다 웃겼어.”

 

 

 

전에 없던 환한 웃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빈은 화사해져 있었다. 여기 도대체 어떻게 온 거예요? 아예 올 생각도 없던 거 아니에요? 동민은 마음과 달리 말이 엇나간다. 빈은 그래도 그냥 웃기만 했다. 전 같았으면 무심한 표정으로 그래서 어쩌라고, 라며 뒤돌아섰을 텐데. 가만 웃고 있는 얼굴은 사실 울고 있는 얼굴이었는데. 동민도 다 알고 있었다. 빈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자신에게 오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지. 어떻게든 그냥 곁에 있으려면 다른 거 다 무시하고 있을 수 있었는데.

 

 

 

“미안하다면서.”

“응.”

“근데 왜 왔냐고.”

“알잖아.”

“몰라.”

“사랑하는 거.”

 

 

 

진짜 존나 짜증나는데 예뻐 죽겠네. 그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맥주 캔 옆에 동민이 떠날 때 주었던 단도가 같이 놓여있었다.

 

 

 

“죽지 않을 만큼만?”

“진짜로 하게요?”

“그러니까 너도 해달라고.”

 

 

 

평생 흉터로 남게, 그래서 다른 거 말고 너만 생각할 수 있게. 영원히 여기서 살 수 있게.

 

 

 

계간은콩 2018 겨울호 line up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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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줘> - 다로 / 라푼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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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은콩 2018 겨울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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